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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나] 익숙해지지 않는 여름 독일의 동반자, 말벌 '베스페'

아무렇지 않은 독일인, 그렇지 않은 외국인…3년 살았지만 적응 안 돼

2020.09.10(Thu) 10:38:54

[비즈한국] “와, 전속력으로 달리는 거 봐. 달리기 대회 나가도 되겠는데? 넌 그냥 뒤에서 소리만 지르면 될 것 같아. ‘뛰어, 벌이야!’” 

 

얼마 전 동네에서 만난 아들 친구 엄마가 벌을 피해 발이 안 보이도록 달리는 아이를 보고 농담을 했다. 다 같이 한바탕 웃으면서도 나는 민망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던 독일인인 아이 친구는 침착하게 벌을 쫓으며 말했다. “사과주스를 시킨 게 잘못된 선택인 것 같아요.” 아이가 주문한 사과주스 잔에 서너 마리 벌들이 맴돌더니 한 마리는 아예 컵 안으로 들어가 헤엄치기까지 했다.

 

종류를 막론하고 음식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꼬이는 베스페. 완벽한 대상을 찾아내면 동료들까지 대거 불러온다. 사진=박진영 제공


베를린에서 3년 넘게 살다 보니 이 정도 풍경은 일상인데, 아들은 여전히 벌을 피하느라 난리법석이다.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는 나도 카페나 레스토랑에 앉아있을 때, 아이스크림을 들고 걸어갈 때 주위를 맴도는 벌들이 여전히 유쾌하지 않다.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독일 사람들은 어쩜 저렇게 평온할 수 있는지. 벌이 왔을 때 어떤 식으로 대처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독일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처음 베를린에 왔을 때, 아이와 빵을 사러 베이커리 카페에 갔다가 수많은 벌들이 빵 위에 앉아있거나 날아다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벌도 벌이지만 일하는 사람들도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빵을 주문하거나 먹는 모습은 적잖이 충격이었다.

 

여름철, 독일 전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벌들은 장수말벌과의 ‘베스페(wespe)’다. 말벌 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아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말벌과는 다른 류. 독일인들은 웬만해선 잘 쏘지 않고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며 안심시키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익숙해지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독일의 베스페는 단맛을 좋아하는 꿀벌과 달리 잡식성이다. 달콤한 빵이며 주스 같은 음료는 물론이고, 온갖 종류의 음식들, 심지어 커피와 맥주가 있는 곳에도 몰려드니 여름철 몇 달 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벌을 피할 수 없다. 창문을 열어두면 여지없이 날아드니 집안이라도 예외가 없다. 

 

잘 쏘지 않는다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여름 시즌 활동하는 수많은 개체에 비하면 다수라고 할 수 없을진 몰라도 쏘여본 경험자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길을 가다 쏘인 사람도 있고, 벌이 옷 안으로 파고 들어와 쏘인 사람도 있고, 벌을 쫓다 쏘인 사람도 있다. 가장 흔하고 가장 위험한 케이스는 음료에 빠진 베스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들이켰다가 쏘이는 경우다.

 

음식 냄새를 풍기는 카페와 레스토랑 안팎은 베스페들로 가득하다. 옆자리 빈 테이블 설탕 통 안에는 이미 몇 마리의 베스페가 들어가 있다. 사진=박진영 제공


최근 지인 한 명도 야외에서 커피를 마시다 커피 속에 빠져있던 벌이 입천장을 쏘는 바람에 며칠간 입안이 부은 채 고생하기도 했다. 더 위험한 경우는 목 안으로 넘어간 벌이 목 안을 쏘는 케이스다. 베를린에서 이비인후과 의사로 일하는 지인에 따르면, 여름철 가장 많은 이비인후과 수술 환자 케이스 중 하나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앞서 말했지만 커피, 차, 맥주 등 가리지 않는 베스페의 식성 탓이다. 

 

여름철 공생관계로 살아가는 독일인들처럼은 할 수 없기도 하고, 벌 한 마리만 떴다 하면 일단 뛰고 보는 아들 때문에 나름 베스페를 쫓기 위한 많은 시도와 노력을 해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에서 컵 받침으로 잔을 덮어두어 벌이 들어가는 상황을 방지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달콤한 무언가를 일부러 조금 멀리 두어 그곳에만 벌이 모이도록 해보기도 하고, 강한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벌레 퇴치제를 주변에 뿌려본 적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달콤한 음식을 두었을 때는 처음 한 마리로 시작한 게 거의 떼로 몰리다시피 해 혼비백산하기도 했고 벌레 퇴치제도 어쩐지 더 벌을 꼬이게 만들었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면 레몬이나 탄 커피 찌꺼기 등의 냄새도 싫어한다는데 레몬차 안에 벌이 빠지는 경험까지 해봤다. 탄 커피 찌꺼기는 아직 들고 다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으나 그간 실패담을 생각하면 별로 기대할 것도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벌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재미있는 사실은 베스페들이 법적으로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연방자연보호법에 따르면 말벌 및 기타 야생동물을 합당한 이유 없이 포획하거나 부상, 사망에 이르게 할 경우 최대 5만 유로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돼 있는 것. 물론, 벌을 죽였다고 벌금 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긴 하다. ‘하나를 죽이면 다섯이 장례식에 참석한다’는 베스페 관련 독일 속담도 있다. 곤경에 처한 베스페가 페로몬을 통해 신호를 보내면 친구들이 온다는 것. 아예 죽일 생각일랑 하지도 않는 게 좋겠다. 

 

9월 들어 슬슬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여전히 베스페들은 기세가 등등하지만, 날이 더 차가워지기 시작하면 곧 자취를 감추겠지. 계절 변화에 적응할 새 없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이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론 베스페로부터 자유로워지니 좋다고 해야 하나.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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