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충직하고 옳고 그름을 능히 구별할 줄 아는 상상의 동물 ‘해태’의 이름을 따온 해태그룹은 한 때 재계 24위로 15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2조 7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재벌그룹이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구별한다는 해태도 주인인 박건배 회장의 잘못된 길을 막지 못했다.
#해태제과의 식품 제조업 중심 사업다각화
해태제과 합명회사의 창업주인 박병규 씨는 광복 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던 나가오카 제과(영강제과)의 경리직원이었다. 박병규 씨는 광복 직후 용산 남영동 공장을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3명과 공동으로 불하받아 해태제과합명회사로 이름을 지은 것이 해태그룹의 시작이다.
해태제과 합명회사는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 드롭스 사탕을 수입했고 한국전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연양갱과 카라멜을 만들어 팔며 힘든 시기를 넘겨 1958년 비스켓을 제조하는 해태산업(주)를 설립했다. 이후 1960년 해태제과합명회사는 해태제과공업(주)로 명칭을 변경했고, 1961년 해태산업(주)를 흡수‧합병했다.
기존 용산구 남영동과 성북구 보문동에 있던 공장을 두고 영등포구 양평동으로 이전해 3500평 규모의 새 둥지를 틀었다. 위생관리를 잘 해온 덕에 1970년 미8군 위생검사에 통과해 군납업 자격을 얻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1972년 해태제과공업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며 기업의 면모를 갖췄다.
해태제과는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나서 메도골드코리아(해태유업), 한국 산토리(해태식품), 감귤냉장판매(해태농수산)를 인수했다. 1978년에는 무역회사인 해태상사를 설립해 제과 수출에 힘을 실었다. 해태제과는 전국 도로에 해태상을 세우며 기업 이미지 제고에도 힘썼다.
해태제과가 공격적으로 사업다각화를 진행한 이유는 제과 시장이 과열됐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제과 사업을 하던 고 신격호 명예회장은 1967년 국내에 롯데제과를 세웠는데, 1972년까지 껌 시장을 선점했던 해태제과는 롯데제과에게 1위를 넘겨주기도 했다.
1983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기업 바툭과 현지 법인을 설립해 해외시장 개척에 힘썼으며, 1984년 광주에 공장을 완공하며 사세를 넓혔다. 1987년 해태제과(주)로 이름을 변경해 1997년까지 사용했다. 해태제과는 지금까지도 국민에게도 익숙한 연양갱, 홈런볼, 맛동산, 부라보콘 등 주력 인기상품으로 먹고사는 기업이다. 스낵의 종류를 다각화 하고 싶었던 해태제과는 일본 제과회사인 가루비와 합작해 해태가루비(주)를 탄생시킨다.
#해태그룹의 2세 경영 도래
4명이 창업한 해태그룹이었기에 2세 경영에 돌입하자 경영권 갈등을 피해갈 수 없었다. 창업주 중 1명인 한달성은 공장장으로 경영에 큰 뜻은 없었다고 한다. 사실상 나머지 3명이 해태그룹을 이끌었다. 30년 넘게 공동운영하던 해태그룹은 1977년 12월 11일 박병규 사장이 53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분리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2세 경영이 시작되며 이들은 지분 정리를 위해 사업영역을 나누었다. 1977년 12월 29일 박병규 창업주가 사망한지 18일 뒤 임시주총이 열렸다. 임시주총 의결로 박병규 창업주의 아들인 박건배 해태제과 기획과장은 상무이사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1978년 전무이사, 1979년 부사장을 거쳐 1981년 해태제과, 해태상사, 해태음료의 사장이 되며 해태그룹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박건배 회장이 해태그룹에서 입지를 다지는 가운데, 1988년 민후식 창업주의 아들인 민병헌은 해태유업, 신덕발 창업주의 아들인 신정차는 해태관광의 경영권을 분리해서 나가게 된다. 이때 해태그룹은 해태제과, 해태음료, 해태산업 등 식품 계열사 6개와 해태상사, 신방전자, 해태타이거즈 등 4개의 비식품 계열사를 갖게 됐다. 박건배 회장 체제의 해태그룹은 1996년 말 기준 자산 3조 3900억 원, 매출액 2조 7100억 원으로 재계 24위까지 올랐다.
#박건배 회장의 특별한 외도
박건배 회장은 1986년 그룹 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식료품업의 비중을 줄이며 사업다각화를 진행했다. 1990년까지 1조 5000억 원의 그룹 매출 달성을 목표로 하며 주력 사업인 식품 분야를 수익성 위주로 경영하고, 전자 등 비식품 분야는 지속적인 확대 성장을 도모하기로 했다. 1990년에는 식품과 비식품의 매출 비중을 50대 50으로 만들고 그룹 발전 5개년이 끝난 이후 비식품에 치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건배 회장은 1988년 신방전자를 해태전자로 이름을 바꿨고, 1994년 12월 기술, 유통망 등이 경쟁사 등에 밀린다는 이유로 전문 오디오업체인 인켈을 인수했다. 1995년에는 전화기 전문 제조업체 나우정밀을 인수해 인켈과 합병하며 전자그룹으로의 도약을 꿈꿨다.
해태그룹은 기존에 인수했던 미진공업사를 1997년 해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며 중공업에도 진출하려 했다. 식품의 보완재 역할로 전자와 중공업을 택한 셈이다. 하지만 전자와 중공업은 지속적인 적자가 발생하며 부채가 크게 증가해 해태그룹을 옥죄었다.
한편 박건배 회장은 1983년 각사 자율경영체제로 전환했다. 이후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보이스카우트 연맹 부총재, 대한역도연맹 회장, 보이스카우트 연맹 총재, 세계보이스카우트 연맹 이사를 역임하며 그룹보다 외부 활동에 치중하는 엉뚱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해태그룹은 해태전자, 해태중공업의 빚을 감당하지 못했다. 1997년 8월 22일 어음 200억 원을 결제하지 못하며 부도위기를 맞았다. 이에 조흥은행 등이 자금을 지원해 부도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2달 뒤인 11월 만기된 어음 196억 원을 처리하지 못해 해태제과 등 3개 계열사가 부도 처리됐다.
#해태그룹 ‘그 후’
1996년 재계 24위였던 해태그룹이 부도 직전 은행에서 빌린 돈은 총 2조 9780억 원이었다. 전자, 중공업 관련 대부분의 계열사는 정리됐다. 식품관련 계열사는 대부분 해태제과에 합병된 후 2001년 외국 UBS컨소시엄에 매각되었다. 이후 2005년 크라운제과가 인수해 해태제과식품으로 탄생시켰다. 2017년 크라운제과는 크라운해태홀딩스로 전환하며 해태제과식품을 산하에 뒀다.
2011년 크라운해태홀딩스의 해태제과식품과 가루비는 과거의 연을 이어 다시 해태가루비 합작법인을 냈다. 해태제과식품은 2014년 대한민국을 강타한 허니버터칩을 만들었는데, 허니버터칩은 출시 4개월 만에 매출 110억 원, 2015년 523억 원을 돌파하면서 허니버터칩 품귀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2020년 1월 해태제과식품은 빙과류사업을 분할해 해태아이스크림을 신설했다. 당해 4월에 해태아이스크림을 빙그레에 1400억 원에 매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태유통은 이랜드를 거쳐 신세계에 다시 매각됐으며, 해태산업은 국순당에 매각되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1983년부터 1997년까지 15시즌 중 9회의 한국시리즈를 우승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기아자동차에 인수돼 기아 타이거즈로 전환됐다.
한편 해태그룹에서 빠져나간 해태유업은 ‘해태’의 이름을 유지해 해태 계열사로 인식되어 자금난을 겪어 부도된 황당한 일도 발생했다. 결국 2004년 6월 해태유업은 상장폐지됐으며 동원그룹에 인수돼 동원F&B로 합병됐다.
박건배 전 회장은 1997년 횡령한 비자금 19억 원으로 기소되었다가 석방되기도 했으며, 2003년 1500억 원 분식회계 및 2300억 원 사기대출 사건 등을 저질러 징역 3년에 집행유행 4년을 선고받았다. 2001년 위장 계열사를 통해 35억 원을 횡령한 혐의가 추가로 밝혀져 징역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박건배 전 회장은 와인 유통 사업으로 재기를 꿈꿨다. 1989년 설립된 해태산업의 수입주류 자회사 금양인터내셔날을 1999년 해태그룹 해체 때 직원들의 퇴직금으로 주식을 인수해 새출발했다. 이 회사의 최대 주주는 박건배 전 회장의 아들인 박재범 사장으로 33.14%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7년 6월 건설업체인 까뮤이엔씨가 지분 79.34%를 매입하며 박 사장은 돌연 퇴사했다.
정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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