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가끔 마음이 하 답답하고 울분이 차오를 때 “우리, 바다나 다녀올까?” 할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코로나가 극심한 지금은 집 앞 외출도 조심스럽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차하면 동해로, 서해로, 남해로, 그리고 바다 건너 제주도로 달음질쳐갈 수 있으니까. 특히 제주도는 작은 이 나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하는 섬. 이 소중한 섬을 애정으로 바라본 드라마가 있으니 2009년 방영한 ‘탐나는도다’다.
정혜나 작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탐나는도다’는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탐라(제주의 옛 명칭)에서 태어나고 자란 잠녀(해녀) 장버진(서우)과 한양에서 귀양 온 선비 박규(임주환),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다 표류된 영국 청년 윌리엄(황찬빈),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는 상인 얀 가와무라(이선호), 역적의 자식으로 나락했으나 나라를 쥐락펴락 하는 상단의 객주가 된 서린(김민주) 등 주요 인물부터 독특하다. 제주도의 해녀와 귀양 선비, 표류한 외국인,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상인이라니, 신분제가 철저한 답답한 조선에서 돋보이기 어려운 인물들 아닌가.
게다가 그 역할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지금 다시 봐도 도전정신없이 꾸릴 수 없는 신선한 얼굴들. ‘옥메까와’라는 독특한 아이스크림 CF로 눈도장을 찍은 서우나 첫 주연을 맡은 임주환, 모델로 활동하던 프랑스인 황찬빈(본명 피에르 데포르트) 등 주연진 모두가 신인급이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보기 드문 사전제작 드라마였으나 애매한 편성(평일 미니시리즈에 어울리는데 주말극 편성)과 그로 인한 대진운(‘솔약국집 아들들’과 붙었다)으로 시청률은 ‘우울하도다’를 기록했지만, 그래도 ‘탐나는도다’는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왜냐고?
‘탐나는도다’는 기분전환으로 떠나는 휴양지 또는 단기로 살고 싶은 로망의 땅인 제주도의 아름다움은 물론 관광객이 아닌 평생 탐라에서 벗어난 적 없는 17세기 제주도 백성들의 생동성(生動性)과 한(限)을 균형적으로 다뤄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 장버진에게 탐라는 가쁜 숨을 참아가며 바다에서 물질을 해야 하고 밭에서 귤을 따야 하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매일의 노동만이 기다리고 있는 공간이다. 버진뿐 아니라 조선의 제주인들은 평생 바다에서 전복과 해삼을 캐고, 밭에서 귤을 따고, 산에서 말총에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도록 말을 살찌운 뒤 육지의 임금에게 진상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육지의 임금과 사대부들에게 탐라는 귀한 진상품들을 꾸준히 진상하는 천혜의 보고인 동시에 사대부 양반인 박규 같은 신분에게는 중죄를 저질러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천혜의 감옥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공간이었다.
거듭되는 진상품 도난 사건을 해결하러 ‘귀양다리’(귀양살이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위장해 탐라에 온 박규 또한 탐라에 대한 시선이 딱 그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버진을 만나면서, 버진의 어머니인 대상군(해녀 무리의 대장)을 비롯해 모계사회라 해도 좋을 만큼 생기 넘치는 제주도 여자들과 그들이 이끄는 가족들을 보면서 박규는 달라진다. 박규뿐인가.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동양을 그저 신기한 보물들이 가득한 신기한 곳으로 여기던 영국인 윌리엄도 버진이라는 보물 도자기보다 더 귀한 사람을 만나며 성장하고, 자로 잰 듯 공명정대하게 업무에만 매진하면 된다고 여기던 외지인 출신 관리 이방(조승연) 또한 일 이전에 사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멜 표류기’를 연상시키는 윌리엄의 행보도 눈에 띈다. 실제로 ‘탐나는도다’의 정혜나 만화가는 ‘하멜 표류기’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미 조선에 정착해 ‘박연’이란 이름으로 살던 네덜란드인 얀 벨테브레(로버트 할리)를 등장시키는 장면까지 나올 정도. 실제로 하멜에게 “정 붙이고 살면 살 만하다”고 말했던 박연과 결국은 탈출해 ‘하멜 표류기’라는 베스트셀러(!)를 쓴 하멜이 조선에서 어떻게 지냈을지를 ‘탐나는도다’를 보는 내내 상상해보게 된다. 병자호란 이후 폐쇄적인 정책을 고수하던 인조와 그와 달리 청나라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새로운 나라를 구상하는 소현세자와 그의 친구 박규의 모습을 슬쩍 비추면서 혼란의 17세기 조선을 엿볼 수 있는 건 덤.
하지만 무엇보다 ‘탐나는도다’의 장점은 생기 넘치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별처럼 빛나는 청춘들, 그리고 그들을 더욱 반짝반짝 빛나게 비춰주는 아름다운 탐라의 모습이 한데 어우러지는 데 있다. 시시때때로 해탈한 듯한 말을 던지던 ‘미친 할아방’(이호성)이 말했듯 ‘탐나는도다’ 속 탐라는 수탈의 현장임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산방산이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버티고 있는 버진네 가족들이 살던 대정읍 산방골, 해녀들이 물질을 하던 평화로운 우도, 성산일출봉 등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원래 70분짜리 20부작 예정이었던 ‘탐나는도다’는 주말극으로 편성되며 60분짜리 20부작이 되었다가 시청률 경쟁에 밀리며 16부작으로 조기종영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법. 이 드라마의 매력에 빠진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21부작 완결판 DVD가 출시되었을 정도니까. ‘탐라는 섬이다’와 ‘탐난다’라는 중의적 뜻을 지닌 ‘탐나는도다’를 한 번 보시라. 지금 봐도 탐나는 요소들이 그득하다고.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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