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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남북이 잊은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찾아, 밀양 의열기념관

김원봉 생가터에 항일운동테마거리 조성…윤세주 등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활약 조명

2020.08.12(Wed) 09:59:43

[비즈한국]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천만 관객이 본 영화 ‘암살’을 통해 재조명된 의열단장 김원봉의 고향 밀양은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지난 2018년 김원봉 생가터에 문을 연 의열기념관과 이 일대에 조성된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서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을 살펴볼 수 있다. 광복 75주년, 아이와 함께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는 또 다른 독립운동의 역사를 둘러보기 좋은 장소다. 밀양은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코로나19의 영향이 적어 별도의 예약 없이 관람 가능하다. 

 

밀양 의열기념관 일대 항일운동테마거리에 벽화로 그려진 약산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은 물론 아내 박차정 또한 의열단원으로 항일운동에 힘을 썼다. 사진=구완회 제공

 

#김원봉과 밀양 사람들의 독립운동

 

단정한 외관의 아담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약산 김원봉에 대한 소개글와 함께 의열투쟁의 주요 연표가 보인다. 이어지는 대형 스크린에는 약산과 의열단의 항일 독립투쟁 관련 영상이 펼쳐진다. 그 중에는 조선의용대 시절 약산의 연설 영상도 있다. 학창 시절부터 웅변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는 약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형형한 눈빛은 지금도 듣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달군다.

 

1898년 경상남도 밀양구 부북면 감천리 57번지(현재 밀양시 노상하길 25-12)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일찍부터 항일 독립의식이 투철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일본 왕의 생일 축하 행사를 위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 화장실에 처박아버렸을 정도.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김원봉은 자퇴해야 했다. 당시 이 작은 거사를 함께 치른 인물이 세 살 어린 이웃 동생 윤세주였다. 훗날 둘은 같이 의열단을 만들면서 항일 독립운동의 평생 동지가 된다. 의열기념관 바로 옆 공터가 윤세주의 생가터다. 지금 여기에는 미처 해방을 못 보고 일제와의 전투 중 눈을 감은 윤세주 열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지난 2018년 김원봉 생가터에 문을 연 의열기념관. 김원봉은 일찍부터 항일 독립의식이 투철했다고 한다. 사진=구완회 제공

 

의열기념관 바로 옆 공터는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만든 윤세주의 생가터로 윤세주 열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서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초등학교를 자퇴한 약산과 윤세주는 몇 년 후 밀양의 동화중학교에 입학했다. 충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선비의 고장인 밀양 사람들은 일찍부터 민족 교육에 힘썼고, 그 중심에는 동화중학교가 있었다. 밀양이 독립운동의 요람이 된 것도 이러한 교육의 영향이 컸다. 

 

마침내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운 약산은 중국으로 떠나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밀양에 남아 3·1운동을 주도한 윤세주는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의 약산을 찾아갔고, 그해 11월 중국 길림에서 조선 청년 10여 명은 “천하의 의(義)로운 일을 열(烈)렬히 실행하기로 맹세”했다. 이름만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의열단이 탄생한 것이다. 의열기념관 2층에는 당시 이들이 모여 의열단을 결성한 ‘반씨 주택’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조선의용대 시절 김원봉의 연설 장면. 사진=구완회 제공


의열단의 투쟁은 식민 지배자와 민족 반역자의 처단, 조선총독부 등 식민 지배기관의 파괴에 집중되었다. 정규 병력으로는 맞설 수 없는 일제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무력 투쟁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의열단원 최수봉이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김익상 등이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을 저격하고,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의 배후에는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이 있었다. 약산의 아내 박차정 또한 결혼 전부터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였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옥고를 치르고 의열단원 오빠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망명, 자신도 의열단에 가입하고 김원봉과 결혼했다. 이후에도 박차정의 항일운동은 지속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해방 1년을 남기고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의열기념관 2층에는 약산뿐 아니라 아내의 독립운동 활동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태극기 따라 항일운동테마거리 산책

 

의열기념관 일대는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져 있다. 해천이란 의열기념관 앞을 흐르는 작은 냇물로 조선 시대 밀양읍성을 따라 조성했던 방어용 해자였다. 근대 이후 읍성과 함께 사라졌던 해천은 몇 년 전 복원되어 시민들의 산책로 겸 휴식공간이 되었는데, 여기에 항일운동 벽화를 더한 것이다.

 

밀양의 만세운동 벽화에서 시작하는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는 태극기의 종류와 변천사를 거쳐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 사진으로 이어진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 윤세주가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 단체였다.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 중심이던 의열단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맞설 무장 부대를 만든 것이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의열기념관 일대는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져 있다. 해천은 의열기념관 앞을 흐르는 작은 냇물로 몇 년 전 복원되면서 항일운동 벽화를 더했다. 사진=구완회 제공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 그려진 밀양 만세운동 벽화. 사진=구완회 제공


이렇듯 일제 강점기 내내 해외에서 항일 독립투쟁에 앞장선 약산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여운형 등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다시 고용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뜻을 함께했던 여운형마저 암살을 당하는 등 남한에서의 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와 같이 38선을 넘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던 김원봉은 결국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으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뒤에는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 빼곡히 붙어 있는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에는 오직 한 사람, 약산 김원봉만이 아무런 훈장도 표창도 없다. 남한에서는 월북을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약산은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독립운동가였다.

 

<여행메모>


의열기념관 

△위치: 경남 밀양시 노상하1길 25-12

△문의: 055-351-0815

△관람시간: 09:00~18:00, 월요일·1월 1일·명절 당일 휴관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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