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사극 레전드’를 꼽을 때 뇌를 거치지 않고 입에서 바로 튀어나오는 이름들이 있다. 유동근, 김영철, 그리고 최수종. 우리나라 정통 사극 역사에서 이 세 배우의 이름이 빠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누구나 인정하는 ‘사극 레전드’ 배우들이다. 레전드지만 세 사람이 사극에서 펼치는 분위기는 확연히 다르다. 유동근이 좌중의 공기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호랑이 같은 포효를 펼친다면, 김영철은 나직한 카리스마와 광기 사이를 줄 탄다.
최수종은 조금 다르다. 사극에서 주로 선역을 맡는 최수종은 오랜 세월 담금질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외유내강 성장형 캐릭터의 길고 차분한 호흡과 안정된 발성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태정태세문단세~’로 시작되는 조선왕조 역대 왕 리스트에서 마지막 27대 순종의 다음이 ‘수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통용될 만큼 왕 역할을 여러 번 맡았는데,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나 발해를 건국한 고왕 대조영,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태종 무열왕처럼 창업 군주 캐릭터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재미난 건 정작 그가 조선시대 왕을 맡은 건 추존된 사도세자를 제외하면 ‘조선왕조 오백년-대원군’에서의 철종뿐이라는 점.
최수종의 사극은 데뷔 초인 ‘조선왕조 오백년-한중록’(1988)의 사도세자 역할이 처음이었지만, 이때는 그가 훗날 스스로 ‘발연기’였음을 인정할 만큼 허술했다. 그의 사극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본격적인 사극 제왕의 길로 입문하게 해준 ‘태조 왕건’(2000)과 해상왕 장보고를 연기한 ‘해신’(2004), 그리고 ‘대조영’(2006)일 것이다. 방영 당시 높은 시청률은 물론 지금까지도 케이블 채널에서 여러 차례 재방영할 만큼 인기가 좋은데, 정통 사극과 퓨전 사극을 넘나드는 만큼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분명한 건 최수종이란 배우가 도드라지는 작품들이란 것.
‘태조 왕건’은 ‘최수종이 사극을?’이란 의문에서 출발해 ‘최수종이 사극도’라는 믿음으로 마무리된 작품. 2000년 4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방영한, 한국 사극 역사상 가장 긴 장편인 200부작 드라마로도 유명하다. 정통 사극에 동그스름한 얼굴에 쌍꺼풀이 짙은 최수종이 왕건 역할로 캐스팅되었다고 하자 반발이 꽤나 심했다. 나 역시 ‘그건 아니잖아?’ 싶었을 정도. 지금이야 최수종이 사극 제왕으로 불리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질투’ ‘파일럿’ 같은 트렌디 드라마의 청년과 ‘아들과 딸’ ‘첫사랑’ ‘야망의 전설’ 같은 가족극의 청년 이미지가 강했거든. 그러나 최수종은 자신이 맡은 주인공만큼 불굴의 의지로 정통 사극에 안정적으로 안착했다.
‘사극빠’인 내가 개인적으로 최고로 치는 사극은 지금도 ‘용의 눈물’이지만, ‘태조 왕건’은 등장 자체가 신선했다. 왕건을 비롯해 궁예, 견훤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시대의 패권을 사로잡으려 자웅을 겨루는 후삼국시대라니, 조선도 아니고 고려 건국 일대기라니! ‘태조 왕건’ 이전까지 고려란 나라는 국사시간에 하품을 삼키며 달달 외우는 낯선 나라에 불과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달달 외우지만 고려시대 왕이라곤 태조 왕건과 노비 안검법의 광종, 개혁하려다 스러진 공민왕과 여말선초를 다룬 드라마에서 나약하게 등장하는 우왕과 창왕, 공양왕 정도만 기억난다. 오히려 고구려 왕이 더 기억에 많이 남을 정도. 나를 비롯 고려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이 조선 건국만큼이나 임팩트 있게 고려 건국사를 기억하게 된 건 ‘태조 왕건’의 공이 컸다.
비록 드라마 방영 당시에는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라는 명대사로 기억되는 관심법의 궁예(김영철)나 “수달이가 죽었어!”를 외치던 인간미 쩌는 견훤(서인석)이 돋보이긴 했지만, 쟁쟁한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 안정적으로 왕건을 연기한 최수종의 공이 지대했다는 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궁예로 2000년 KBS 연기대상을 거머쥔 김영철에 이어 2001년 연기대상이 그의 몫이 된 것은 정당한 대우였다고 본다.
‘태조 왕건’으로 불을 지핀 최수종의 사극 인생은 ‘해신’과 ‘대조영’으로 화려하게 꽃피운다. 2004년 말 ‘해신’을 시작으로 2007년 말 ‘대조영’이 끝날 때까지 시청자들은 갑옷을 입고 전장터를 누비는 최수종의 모습을 지켜봤다. ‘해신’은 통일신라 시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아시아 바다를 재패한 ‘해상왕’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뤘는데, 교과서 속 몇 줄로 기록된 인물을 생동하는 입체적 인물로 소환한 장점이 돋보인다.
나는 당시에도 아름답지만 탐욕스러운 자미부인(채시라)의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많은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악역 염장(송일국)에 시선을 줬지만, 드라마를 ‘하드캐리’한 최수종의 열연은 높이 산다. 밑바닥 노예 인생에서 왕 부럽지 않은 자리에 오르기까지 한 발 한 발 성장하는 영웅담도 ‘해신’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태조, 태종, 세조, 흥선대원군 등 지략을 펼치며 권력을 탐하는 캐릭터가 잘 어울리는 유동근, 김영철과 달리 최수종은 장보고처럼 인고(忍苦)의 캐릭터에서 빛을 발했다.
최수종 사극 중 많은 이들이 최고라 손꼽는 ‘대조영’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교과서에 몇 줄 기록되지 않은 발해의 창업군주 고왕 대조영을 연기해 낯선 나라 발해를 친근하게 만든 드라마다. 아마 ‘대조영’을 보면서 ‘삼국지’의 유비-관우-장비의 관계가 오버랩되는 대조영-걸비사우(최철호)-흑수돌(김학철)의 뜨거운 형제애에 눈시울을 붉히던 이들이 많았으리라. 설인귀(이덕화), 이해고(정보석), 대중상(임혁), 계필사문(윤용현), 퉁소(방형주) 등 넉살스럽고도 선이 굵은 남성 캐릭터들과 초린(박예진)과 금란(심은진) 등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힘겨우면서도 강인한 여성 캐릭터들도 선연하다. 물론 그 즐비한 인물들 가운데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은 대조영을 연기한 최수종이다.
이외에도 ‘태양인 이제마’ ‘대왕의 꿈’ ‘임진왜란 1592’ 등 여러 사극에 등장한 최수종. 그러니까 한국 사극에서 최수종은 ‘삼국을 통일한 뒤(대왕의 꿈) 발해를 창건하고(대조영) 청해진을 설치한 후(해신)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도 통일하며(태조 왕건) 조선을 구한 뒤(임진왜란 1592) 뒤주에 갇히기도 했으나(조선왕조 오백년-한중록) 사상의학을 확립(태양인 이제마)한’ 전무후무한 인물인 것이다(나무위키 참조). ‘임진왜란 1952’(2016) 이후엔 주말 가족극 ‘하나뿐인 내편’의 ‘도란이 아빠’와 예능 프로그램 속 친근한 이미지로 얼굴을 비추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궁금하다. 그가 다음에 어떤 사극에 등장할지. 그간 걸어온 최수종표 사극을 이어가자면 소금장수에서 왕이 된 고구려 미천왕이 어떨까 싶긴 한데, 나이가 있어 청년 역할은 무리일 것 같고. 과연 다음 사극은 무엇이 될까?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올드라마]
기레기 말고 진짜 기자의 성장담 '스포트라이트'
· [올드라마]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 다섯 가족의 활약 '딸부잣집'
· [올드라마]
운 좋은 착한 주인공을 누가 당해낼까 '이브의 모든 것'
· [올드라마]
발랄한 동거 판타지로 시대의 터부를 무너뜨리다 '옥탑방 고양이'
· [올드라마]
'온에어'가 보여준 김은숙의 장기, 왜 지금 '더 킹'에선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