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기자가 선망의 직업이었던 때가 있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믿음, 사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언론고시’에 매진하던 청년들도 있었다. 지금은? 글쎄다. 여전히 ‘언론고시’에 매진하는 청년들이 있을 거고, 아직도 기자를 선망의 직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보다 요즘은 ‘기레기’라는 말을 더 자주 입에 올리는 시대인 듯하다. ‘스포트라이트’가 방영하던 2008년은, 돌이켜보면 그나마 메이저 언론의 힘이 유효하던 시절이긴 했다.
‘스포트라이트’의 방영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심 기대가 컸다. 내 기억으로 ‘스포트라이트’는 기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기자 세계를 본격적으로 표현한 첫 드라마였다. 잡지 기자였던 나의 세계와 ‘스포트라이트’ 속 보도국의 세계에는 서울과 하와이 정도 거리감이 존재하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카테고리 자체는 같으니까. 드라마는 GBS 방송국 보도국 사회부 서우진 기자(손예진)와 그를 진정한 기자의 길로 훈련시키는 시경 캡 오태석(지진희)을 중심으로 하여 서우진 기자의 성장담을 그린다. 드라마가 성공했냐고? 음, 결론만 말하자면 조용히 묻혔다.
사실 지금껏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드문 편이다. 우선 ‘그림’의 때깔이 여타 전문직 드라마에 비해 초라하다. 의학 드라마가 불패신화를 자랑하는 건 생사를 오가는 긴박한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하면서 휴머니즘은 물론 로맨스까지 챙기기 쉽기 때문이다. 선남선녀들의 알콩달콩한 로맨스를 그리는 로코물은 당연하고, 막장에 막장을 거듭하는 가족극도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취재를 거쳐 보도하거나 기사를 쓰는 기자들의 이야기는? 확실히 때깔이 부족하다. 똑같이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다른 전문직들-검사나 경찰 등-에 비해 액션 등 볼거리도 부족하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서 믿을 것이라곤 오직 사회 정의와 진실을 쫓는 이들의 ‘진정성’에 있다. 그 진정성이 통하느냐 아니냐.
‘스포트라이트’의 사회부 2진 기자 서우진은 발로 뛰는 기자다. 워낙 물불을 안 가리는 통에 종종 사고를 거하게 치긴 하지만, 게으르고 무력하거나 현실에 쉽게 타협해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좋은’ 기자에 속한다. 탈옥범 장진규(정진)의 소재를 다방 마담에게서 제보 받고 직접 다방 레지로 위장하여 그의 인터뷰를 따려다 급기야 납치 상황에 처하는 것은 과장되었지만, 그만큼 취재에 열정적인 걸로 해두자. 아무튼 장진규의 생방송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우진은 일약 스타 기자가 된다. 그러면서 GBS 앵커 후보로 꼽히며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내 기자로서 사명감을 깨달으며 선배 기자이자 시경 캡인 태석과 함께 여러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한다는, 그런 스토리.
메이저 방송국 사회부 기자들이 발로 뛰는 만큼, ‘스포트라이트’에는 그간 한국 사회를 지나쳤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여러 형태의 사건들이 등장한다. 우진을 유명하게 만든 탈옥범 장진규에겐 탈옥범 신창원의 모습이 짙게 오버랩되고, 대기업 변호사의 비리 폭로 사건 또한 10여 년 전 있었던 대기업 비자금과 정계 로비 문제를 연상케 한다. 뉴시티 분양 비리, 서해안 경제특구 문제점 등 익숙한(?) 사건들을 거론하며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줘야겠지만, 그 모든 비리의 중심에 영환건설이라는 악(惡)이 있었다는 헐거운 설정과 그 견고한 악들이 서우진의 날카로운(?) 질문 몇 개로 무너져 내린다는 권선징악형 결말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이른바 ‘묻힌 시청률’엔 그런 아쉬움도 있을 것이다.
열심히 발로 뛰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는 서우진의 진정성과 자신의 아버지임에도 오성환 국회의원의 비리를 캐내는 데 주저하지 않고자 애쓰는 오태석의 기자 정신, ‘스포트라이트’가 추구하는 기자상이다. 참된 기자보다 ‘기레기’ ‘기발놈’이란 욕을 들을 법한 기자들이 더 쉽게 눈에 띄는 시대에 ‘스포트라이트’의 기자상은 더없이 판타지스럽다. ‘스포트라이트’의 묻힌 시청률은 판타지스러운 그 기자상이 대중의 공감을 사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기레기’란 말이 본격적으로 대중의 입에 오르내린 건 ‘세월호 침몰사고’부터였지만, 그 이전부터 기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은 뿌리 깊었을 것이다. 너무 뿌리 깊은 나머지, 자신의 안위는 물론 핏줄인 아버지까지 외면하며 진실을 쫓는 기자들의 모습은 너무 억지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스포트라이트’에는 그 흔한 출생의 비밀도 없고, 재벌과 신데렐라의 운명적 로맨스는 물론 주인공끼리의 로맨스도 없다. ‘스포트라이트’가 방영될 때만 해도 전문직을 빙자한 로맨스 드라마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서우진과 오태석의 관계는 ‘썸’을 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되 제대로 된 기자가 되고자 하는 후배와 그를 담금질하는 선배의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심층 탐사 프로그램 ‘스포트라이트’의 앵커가 된 서우진이 앵커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며 “어떤 패배도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그를 마주하는 태석은 우진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 적절한 코칭을 해줄 뿐 그 어떤 로맨스의 열린 결말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로맨스가 전무했던 것이 ‘스포트라이트’의 시청률에는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는 그것이 신선한 시도였다고 본다.
‘스포트라이트’ 이후에도 ‘히어로’ ‘피노키오’ ‘힐러’ ‘조작’ ‘아르곤’ 등 기자 세계를 무대로 한 여러 드라마들이 방영됐다. 각각의 의미도 있고 팬층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두고두고 곱씰을 만한 기자 드라마였나 생각하면 조금씩 아쉬움이 있다. ‘스포트라이트’는 기자 드라마라는 장르(?)를 본격적으로 연 최초의 드라마라는 점에서 여전히 유의미하다. 그래도 ‘스포트라이트’를 넘어서는, ‘그 드라마 진짜 인생 드라마지!’ 할 만큼 가슴을 강타하는 기자 드라마가 나와줬으면 좋겠다. 어뷰징 기사만 써대고, 제대로 된 질문과 던지지 말아야 할 질문을 구분조차 못하는 현실의 ‘기레기’들이 머쓱해질 수 있는 그런 드라마.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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