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뉴턴은 만약 우주가 유한한 공간이라면 우주의 가장 외곽 바깥에 있는 별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든 물질이 잡아당기는 중력에 의해 서서히 우주의 중심을 향해 끌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주가 유한한 세계라면,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우주는 자신의 중력에 의해 한 점으로 모여 뭉쳐 반죽되는 방식으로 파국을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분명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은 너무나 평화롭다. 별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거나 우주가 쪼그라들고 있다는 낌새는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다. 분명 모든 별들이 중력을 통해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는데도 이렇게 평화로운 우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우주는 무한할까, 유한할까. 그리고 우리는 모든 우주를 온전하게 보고 있을까? 놀랍게도 그 답은 천문학자가 아닌 뜻밖의 사람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뉴턴은 우주가 무한한 세계,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공간이어야만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주라는 공간 자체가 무한하다면, 결국 우주에 있는 어떤 한 별에 중력을 행사하는 물질들 역시 사방에 고르게 퍼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주에 있는 별들은 사방에서 비슷한 세기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동시에 느끼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 사방에서 고르게 작용하는 중력의 힘들은 서로 상쇄된다. 뉴턴은 바로 이 덕분에 우주의 모든 별이 특정한 방향으로 끌려가거나 빨려들어가지 않고 계속 자기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자신이 찾아낸 중력이라는 힘이 작용해도 수축하거나 파괴되지 않는 평화로운 우주의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가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세상이라는 가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우주는 다시 변함없이 영원했고, 항상 한결같은 무한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천문학자 올베르스는 뉴턴이 상상한 무한한 우주 역시 끔찍한 모순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올베르스는 뉴턴을 비롯한 당시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우주가 정말 무한한 공간이며 시간적으로도 무한한 과거부터 여전히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했다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어둡고 깜깜한 우주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주가 무한하고 그 무한한 공간에 별들이 사방에 고르게 퍼져 있다고 생각해보자. 여기까지는 큰 거부감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우주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한 공간에 별들이 무한한 과거부터 사방에 고르게 퍼져 있었다고 가정하게 되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분명 사방에서 고르게 쏟아지는 밝은 별빛으로 가득 채워진 눈부신 우주를 봐야 한다.
즉 올베르스는 그 전까지 모두 다 당연하게 생각한 깜깜한 밤하늘, 어두운 우주라는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사실에 반기를 들고 질문을 던졌다. 우주는 왜 어두운가? 밤하늘은 왜 깜깜한가? 이는 단순히 밤이 되면 해가 지평선 아래로 숨어버리기 때문에 어둡다는 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다. 올베르스가 보기엔 뉴턴의 말대로 정말 우주가 무한하다면,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우주 그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밝고 눈부신 세상이어야 했다.
올베르스의 문제 제기를 조금 더 정밀하게 수학적으로 접근해보자. 일단 편의를 위해서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의 밝기가 전부 전체 별들의 평균 밝기로 비슷한 밝기를 갖는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별을 볼 때 그 별까지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가 보게 되는 별의 밝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어두워진다. 그런데 또 훨씬 더 먼 거리에 놓인 우주를 볼수록 우리의 시야 속 우주의 범위도 더 넓어진다. 면적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증가한다. 따라서 우리가 더 먼 우주를 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더 많은 개수의 별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된다.
즉 흥미롭게도, 별의 거리가 더 멀어질수록 밝기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어두워지는 효과와 더 먼 우주까지를 바라볼수록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시야에 들어오는 별의 개수가 늘어나는 효과 두 가지가 정확하게 수학적으로 서로 상쇄된다. 결국 수학적으로만 보더라도 가까운 거리에 떨어진 별들의 밝기의 총합과 훨씬 더 먼 거리에 떨어진 별들의 밝기의 총합은 거의 비슷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무로 울창한 숲 한가운데 갇혀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올베르스의 문제 제기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신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가까운 나무 기둥들은 거리가 가까우니까 시야에 조금 더 두껍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 범위 안에 들어오는 나무 기둥의 개수는 적다. 반면 더 멀리 떨어진 나무 기둥은 시야에서 아주 가늘게 보일 것이다. 또 더 먼 거리에 있는 나무 기둥은 훨씬 더 많은 개수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결국 나무 기둥으로 빽빽한 숲 한가운데에서 어느 방향으로 눈을 돌리더라도 어떤 나무 기둥에 닿기 마련이다. 결국 어느 방향을 보더라도 갈색의 나무 기둥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뉴턴의 말대로 무한한 우주 공간에 별들이 고르게 채워져 있다면, 우리가 어느 쪽 하늘을 바라보더라도 멀든 가깝든 반드시 어떤 별의 표면에 부딪쳐야만 한다. 올베르스는 바로 이러한 문제 제기를 통해 뉴턴이 당연하다는 듯이 가정한 무한한 우주라는 설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분명 눈앞에 펼쳐진 깜깜한 우주라는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주가 무한한 공간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눈부신 세상이 하늘에 펼쳐져야 한다는 이 당황스러운 올베르스의 역설은 놀랍게도 수세기가 지난 끝에 오늘날에 와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고 있다.
올베르스가 던진 깜깜한 밤하늘에 관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눈에 담고 있는 별빛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날아오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별을 본다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별에서 출발한 빛을 눈에 담는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르지만, 동시에 진공 상태의 우주 속에서 일정하게 최고 속도를 유지한다는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 빛은 항상 초속 약 30만 km라는 정해진 규정 속도를 준수한다. 그보다 더 느려지거나 빨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빛을 활용해 광활한 우주의 스케일을 표현한다. 그 빠르고 일정한 빛의 속도로 1년을 날아가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1광년으로 정의한다. 만약 우리가 1광년 거리에 떨어진 별을 보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년 전에 별을 떠나 날아오기 시작한 빛이 이제야 우리의 눈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밤 1광년 거리의 별을 본다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의 별이 아니라 1년 전 별의 모습을 지구에서 뒤늦게 바라보는 셈이다. 더 먼 우주를 볼수록 그만큼 더 과거에서 날아온 우주를 보게 되는 아주 오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매순간 지금보다 1초 전의 모습이고, 하늘에 밝게 떠 있는 태양은 항상 8분 전의 모습이다. 지구에서 약 100광년 떨어진 북두칠성의 별들을 본다면 당신은 지구가 냉전 시대에서 데탕트 시대로 급변하던 시절의 별빛을 지금에야 뒤늦게 보는 것이다.
만약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우주가 단순히 무한한 과거부터 하염없이 존재했다면,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빛의 속도는 유한하다 하더라도, 그 유한한 속도의 빛이 우주 공간 사방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시간은 무한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의 나이가 무한하다면, 즉 우주가 원래 그냥 헤아릴 수 없는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했다면, 올베르스가 고민했던 것처럼 우리 우주는 당연히 밝은 별빛으로 가득 찬 세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20세기 현대 천문학이 새롭게 시작되면서, 천문학자들은 우주가 막연하게 무한한 과거부터 원래 그냥 그대로 존재해온 세상이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일관되게 우리 은하 주변에 멀리 떨어진 많은 외부 은하들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이러한 외부 은하들의 일관된 후퇴 현상은 거리가 더 먼 우주로 갈수록 정도가 강해지고 그 경향도 더 뚜렷해진다. 즉 현재 우리 우주는 은하들 사이에 빈 공간이 계속 늘어나며 은하들 사이 간격이 점점 벌어지는, 우주 시공간 자체가 팽창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우주가 현재 팽창하고 있다면, 우주의 시간을 비디오테이프 되감듯 거꾸로 되감아 우주가 지금보다 덜 팽창했을 과거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되감다 보면 결국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극단적인 밀도의 작은 한 점으로 모여 있던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마치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다보면 더 이상 되감을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는 것처럼, 우주의 테이프 역시 더 이상 거꾸로 되감을 수 없는 가장 태초의 순간, 가장 처음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놀랍게도 관측 천문학자들이 실제 밤하늘을 통해 확인한 이러한 우주의 변화 양상은, 앞서 물리학자들이 수학적인 모델을 통해 추정한, 시간이 흐를수록 팽창하는 우주의 모델과 너무나 잘 부합한다. 서로 다른 관심에서 다른 경로로 출발했던 물리학과 천문학은 놀랍게도, 결국 한 점에서 태동해 지난 130억 년의 긴 세월을 걸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우주가 꾸준하게 팽창했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20세기 이후 천문학자들은 앞선 시대의 천문학자들이 감히 헤아리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우주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 우주의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는다면, 마치 큰 숫자를 세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그냥 아주 큰 숫자를 대충 이야기하는 것처럼, 대충 우주는 무한살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애초에 우주의 나이를 묻는 것 자체가 과학적으로 무의미한 질문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주의 역사에도 분명한 시작점, 시발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주도 분명 이 세상에 처음 탄생했던, 그 역사적인 첫 번째 생일, 우리가 오늘날 빅뱅이라고 부르는 격렬했던 돌잔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우주가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아왔는지 헤아릴 수 있다면,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주의 나이, 아니 어마어마한 우주 어르신의 ‘춘추’를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올베르스는 미처 몰랐지만, 먼 우주에서 날아오기 시작한 빛이 퍼져나갈 수 있는 시간은 유한했다. 우주 탄생 직후부터 빛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빛은 최대 우주의 나이에 해당하는 시간만큼만 사방으로 퍼져나갈 수 있다. 아무리 빛이 오랫동안 우주를 여행한다 하더라도, 우주 자체가 살아온 세월 그 이상의 시간을 여행할 수는 없다.
결국 올베르스가 던진 당혹스럽지만 유익한 질문, 왜 우주는 깜깜한가라는 패러독스에 대해 오늘날 현대 천문학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설령 우주 공간 자체가 무한하더라도 우리는 우주의 나이라는 유한한 세월에만 퍼져온 빛들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지구는 더 넓지만 우리가 산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지구 표면은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가 보는 지평선 너머에 얼마나 더 넓은 우주가 숨어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우리는 분명 우주의 나이에 해당하는 세월 동안 날아온 빛, 그 빛이 허락하는 지평선 속 세상만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또 한 번, 뉴턴이 꿈꿨던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우주는 다시 올베르스의 질문, 그리고 그 답을 찾아 우주를 탐구했던 20세기 천문학자들에 의해 다시 유한한 세상으로, 관측을 통해 우리가 인지 가능한 세상으로 범위가 축소되는 변화를 겪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올베르스의 역설에 대해 오늘날의 현대 천문학이 이야기하고 있는 해답을 놀랍게도 천문학자들보다 훨씬 이전에 간파했던 인물이 한 명 있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그는 전문적으로 밤하늘을 탐구하는 직업 천문학자도 아니었다. 그의 정체는 공포 소설 작가로 더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애드거 앨런 포다. 그는 그 어떤 관측 자료나 수학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문학적인 감수성과 상상력에만 의지해 올베르스의 역설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을 제시했다.
천문학자들이 우리 은하 바깥에 다른 은하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시절에 한 시인이 남긴 내용이다. 혹자는 우주를 만든 조물주가 포에게 강림해서 우주 탄생의 비밀에 관한 영감을 주었던 것 아닐까 하는 농담을 한다. 정말 그런 농담에도 고개가 끄덕거리게 될 정도로, 앨런 포가 남긴 이 놀라운 통찰은 너무나 오늘날의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이해와 잘 맞닿아 있다.
조물주가 정말 포에게 영감을 준 것이라면, 왜 천문학자가 아니라 시인에게 강림했을까. 참 짓궂은 조물주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착각하던 당시 천문학자들보단,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우주의 진리를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의 입을 선택한 것이 더 탁월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칼 세이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콘택트’에는 외계인들이 보내온 설계도로 만든 우주선을 타고 주인공이 외계 행성계를 방문하는 클라이맥스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 앨리(조디 포스터)는 눈앞에 펼쳐진 낯설고 황홀한 외계 행성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인상 깊은 대사를 남긴다.
“이곳에는 (나 같은 과학자 말고) 차라리 시인을 보냈어야 한다(They should’ve sent a poet).”
어쩌면 오늘날 또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시인이 남긴 몇 마디 속에 천문학자들이 아직 다가가지 못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진짜 진리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 뒤늦게 그 속에 담긴 놀라운 통찰력을 재검증하며 짓궂은 우주, 조물주의 삐뚤어진 성격을 원망하는 순간이 다시 오기를….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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