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이 질문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천문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만드는 당황스러운 질문이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몇 년 전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한 예능 프로그램의 명장면이 떠오른다.
코미디언 신동엽은 공중파 방송에서도 개의치 않고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드는 19금 유머로 사랑받는다. 당시 그는 20대 초반인 아이돌 그룹 출신의 젊은 진행자와 함께 중년 가수 부부의 집을 방문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동엽은 결혼 25주년이라는 중년 가수 부부의 좋은 금슬을 치켜세우기 위해 아이돌 그룹 출신 젊은 진행자의 어린 나이를 언급했다. 아이돌 그룹 출신 진행자가 25년 전이면 자신은 아직 태어나기도 전으로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라고 말하자, 신동엽은 “엄마 뱃속이 아니라 아빠 쪽에…”라고 굳이 정정해 한바탕 민망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빠 쪽이 아니라 여기저기 음식에도 있고…”라며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생물학적으로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 속 영양분이 어떻게 분해되고 저장되어 이후 자손을 만들어내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온라인에서 돌아다녔던 이 명장면에서 신동엽이 던진 유머는 그저 야한 농담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생명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생각할 때 모체의 포궁(胞宮) 바깥으로 나와 처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순간부터의 역사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까마득한 먼 과거를 이야기할 때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라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당시 방송에서 신동엽은 우리의 존재성과 정체성이 단순히 모체의 몸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과거에 이미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만약 ‘태어나기 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제대로 된 답변을 줄 수 없는 엉뚱한 우문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신동엽은 우리가 태어난 이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존재성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다른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더 넓은 의미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장한다. 그가 던진 유머는 우리의 본질적인 존재성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의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굉장한 통찰력이 담긴 한마디였다.
#우주의 시공간은 빅뱅과 함께 만들어졌다는 관점
가톨릭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of Hippo, 354~430)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신께서 그런 질문을 깊게 파고드는 사람을 가두기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
아마 아우구스티누스도 오늘날의 천문학자 못지않게 우주가 탄생하기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이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짓궂은 천문학자들은 빅뱅 이전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이 까칠한 가톨릭 주교의 표현을 인용하며 “빅뱅 이전에는 신께서 빅뱅 이전에 대해 물어보는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가두기 위한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라고 퉁명스러운 답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가 독실한 신학자로서 정말 진지하게 신이 지옥을 만들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담겨 있는 그의 ‘고백록(Confessiones)’을 보면 그는 신이 우주를 만들기 이전에는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의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대해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오래전 4세기 가톨릭 주교가 했던 생각은 오늘날 현대 천문학자들이 빅뱅 이전이라는 시점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아주 유사하다!
오늘날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작은 한 점에 모여 있던 아주 극한의 온도와 밀도로 들끓고 있던 상태에서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는 현대적 빅뱅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빅뱅 직후 초기 우주의 모습은 수조 도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뜨거운 온도로 펄펄 끓고 있던 불지옥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어찌 보면 태초의 우주는 지옥과 같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우스갯소리도 나름 과학적으로 타당하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이 불지옥과 같았던 우주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빅뱅 이전은 아니고 빅뱅 직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기존 빅뱅 이론은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모두 빅뱅과 함께 만들어지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우주 자체가 모든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주의 바깥 공간’이라는 것은 정의 자체가 되지 않는다. 또 시간 역시 빅뱅과 함께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빅뱅 이전의 과거’라는 것도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빅뱅이 일어난 이후 시간의 역사는 논할 수 있지만 빅뱅 이전의 시간은 정의할 수도 없으며 따라서 물리적으로 고민할 필요도 없다.
#‘빅뱅 이전’에 대한 질문은 금기시되었다
지성과 유머를 겸비한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1942~2018)의 표현을 빌리자면 빅뱅 이전의 우주를 묻는 것은 ‘남극에서 남쪽이 어디인지를 묻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빅뱅 이전의 우주라는 것은 정의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와 관련해 마땅히 해줄 답도 갖고 있지 않으며 굳이 과학이 답을 해줄 필요도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빅뱅 이전의 우주를 고민하는 것은 오랫동안 그 자체로 터부시되었고 우문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답변은 우리의 궁극적인 기원에 관한 본능적인 호기심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한다. 우리는 여전히 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시간의 화살 위에서 오늘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제가 있어야 한다는 관념 속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우주가 처음 탄생했던 빅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다면 당연히 그 빅뱅이 일어나도록 그 이전에 어떤 사건들이 벌어졌을 것이란 미련을 버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최근까지 현대 천문학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이 답할 필요가 없다는 다소 폭력적이고 무성의한 자세로 질문 자체를 짓누르는 태도를 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과학 스스로가 이 어려운 질문에 합의된 답변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정의되는 것만 이야기한다는 과학의 권위 뒤에 숨어 질문 자체를 피해 도망 다녔던 면도 없지 않다.
오늘날의 물리학과 천문학은 그간 과학자들 사이에서 금기시된 모든 것의 시작 이전, 빅뱅 이전에 관한 질문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또 실험적으로, 관측적으로 검증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던 빅뱅 이전의 순간에 대해 천문학자들은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과거를 추적하고 있을까?
이 금단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늘날의 물리학, 천문학의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계속된다.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galaxy.wb.zi@gmail.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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