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형제관계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을 받고 ‘오남매’라 답하면 으레 이런 말이 뒤따르곤 했다. “아들이 하나인가 봐요?” 혹은 “막내는 아들?” 그럴 때 난 래퍼처럼 빠르게 대답했다. “딸, 딸, 아들, 아들, 딸. 2남 3녀로, 막내는 딸입니다.” 자식이 많으면 무조건 아들 낳기 위해 많을 거라는 단정적인 질문이 무척 진절머리났거든(아들 욕심이 없으셨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딸이 많은 것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시선이 있었던 어릴 적, 드라마 ‘딸부잣집’은 제목부터 신선했다.
1994~1995년에 방영한 ‘딸부잣집’은 제목 그대로 딸이 많은 한 집안의 이야기를 담은 가족극이다. 아내와 사별한 치과의사 아버지 권혁주(김세윤)를 중심으로 위로는 교사 출신의 꼬장꼬장한 할아버지 권치덕(故 전운)이, 아래로는 커리어우먼인 첫째 일령(이휘향), 순박하다 못해 살짝 모자라는 게 아닌가 싶은 둘째 차령(하유미), 뭐든 손해보고 싶지 않은 깍쟁이 셋째 세령(전혜진), 그리고 터프한 성격으로 집안의 사고뭉치인 넷째 우령(변소정)과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애교 있는 막내 소령(이아현)이 함께 산다.
드라마 초반부, 첫째 일령은 이미 결혼해 자식까지 낳은 상태지만 나머지 딸들은 모두 싱글인 상태다. 가족극, 그것도 90년대 중반의 가족극에서 결혼하지 않은 자식들이 다글다글한 집이 나온다면 가장 중요시할 것은 십중팔구 결혼이다. ‘딸부잣집’도 셋째 세령의 결혼을 시작으로 차령에 이어 드라마 말미 넷째와 막내가 합동 약혼식을 치르고, 아버지 혁주 또한 재혼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끝날 정도다. ‘남들 짝 짓는 걸 왜 봐’ 싶으면서도, 그 짝짓기 대소동이 재미났던 건 그 과정이 억지스럽지 않고 재미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섯 딸 모두 개성이 강한지라 각자 결혼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 그 차이를 곱씹어보는 재미가 컸거든.
잘나가지 않는 화가라 경제적으로 무능한 일령의 남편 박혁민(독고영재),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는 독일인인 차령의 남편 칼 토마(당시 이한우, 현재 이참), 깍쟁이 세령 못지않게 신세대를 자처하여 자칫 인간미가 없어 보이는 오인태(윤다훈), 터프한 우령보다 더 터프한 준재벌 2세 정효식(박재훈), 우령과 먼저 친해졌으나 우령의 동생 소령에게 반한 전통 떡집 아들 한준수(이세창) 등 딸들의 남자들도 개성 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워낙 캐릭터들이 확연한지라 각 커플들을 지지하는 시청자들도 고르게 나뉘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건 역시 차령과 칼 토마 커플. 답답할 정도로 순박한 차령의 백치미(?)와 어설픈 듯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사랑을 읊는 칼 토마의 순정이 어우러져 꽤나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당시 드물었던 국제결혼의 애로사항(가족들의 반대, 향수병 등)도 진지하게 조명했고, 외국인인 칼 토마가 한국의 문화 등 장점에 찬사를 보내는 것을 넘어 단점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장면들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혁주네 집안은 90년대 당시 시선으로 봐도 고루해 보일 만큼 보수적이다. 툭하면 마당에 달린 종을 울리며 가족들을 집합시키는 할아버지 치덕은 합당한 이유라 생각이 들 때면 손녀들은 물론 아들 혁주, 사위들까지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를 치곤 한다. 입만 열면 ‘신토불이’ ‘한국인의 자긍심’을 외치는 할아버지와 가장 죽이 잘 맞는 둘째 차령 또한 할아버지의 한복을 방망이로 다듬이질하며 툭하면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을 외치고.
하지만 그 보수적인 집안의 분위기는 ‘신세대’인 딸들과 딸들이 결혼하려는 남자들, 그리고 그들을 보며 서서히 달라지는 어른들에 의해 차츰 변화하고 융화된다. 각자 자신이 옳고 합리적이라 여기던, 실은 적잖이 외곬의 기질이 있던 사람들이 원가족과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며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보는 시청자도 은연중 그 인물들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나라면 어떨 것인가 생각하게끔 만든다.
넷째와 막내가 쌍둥이인 것을 감안해도 자식을 여럿 낳은 것을 보면 혁주네 집안 또한 아들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인 우령의 이름에 ‘또 우(又)’ 자를 넣은 걸 보면 의심은 확심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딸들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일까, 아니면 아들이 아예 없어서일까, 이 집안에 ‘딸이라서, 여자라서’ 그들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모습은 (25년 전임을 감안하면) 퍽 드문 편이다. 딸들의 연애에 걱정은 했지만 부친 권치덕의 보수적인 가르침에 딸들의 개성이 눌릴까 오히려 혁주가 노심초사하는 장면들이 많았을 정도.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딸들 때문에 속이 상하면 홀로 사무실에서 소주를 홀짝이던 혁주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딸부잣집’이 방영하던 1994, 1995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현재 성실한 사회인이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참 오래된 드라마다 싶지만, 그래도 다시 보면 재미나다. 추억에 젖고 싶은 40~50대라면, 혹은 나 태어날 적엔 어떤 드라마가 유행인가 궁금한 90년대생이라면, KBS디지털미디어국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옛날티비’에서 15분 내외로 축약해 업로드 중인 ‘딸부잣집’을 보시라. ‘교양강좌’로 유명한 하유미의 세상 청순하고 순박한 모습을 보는 것도 신선한 즐거움이 될 것이니.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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