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그런 사람이 있다. ‘쟤는 참 팔자가 좋구나, 어떻게 운도 저렇게 좋지?’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 같은 노력을 하고도 노력만큼만 보상 받는 사람이 있고, 노력 이상의 큰 보상을 받는 사람도 있고, 노력만큼도 보상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인생은 공평한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지만 노력 이상의 큰 보상을 받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이브의 모든 것’의 주인공인 진선미(채림)와 허영미(김소연)의 관계가 그렇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엄마는 집을 나가고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어렵사리 자란 허영미. 동네 건달 배인수(최준용)를 남자친구로 두긴 했지만 언제고 이런 막장 같은 삶을 탈출하고 싶기에 악착같이 공부해 명문대 신방과에 합격한 상태다. 반면 진선미는 어릴 적 엄마가 세상을 떴지만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딸을 위하는 아버지(현석)의 사랑을 받으며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 친구 송 여사(박원숙)의 아들인 김우진(한재석)을 어릴 적부터 짝사랑했으나 우진은 선미를 여동생으로만 대해 불만이지만 그 외에 큰 고민은 없다. 공교롭게 영미와 같은 명문대 신방과에 합격한 상태.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영미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연이 닿는다. 건설 현장에서 인부로 일하던 영미 아버지가 사고로 죽자 현장 책임자이던 선미 아버지가 도의적 책임을 느껴 영미를 서울로 데리고 온 것. 선미 아버지가 임시로 우진의 스튜디오 작업실에서 영미가 지낼 수 있도록 부탁하면서, 선미와 영미의 악연은 시작된다. 예쁜 외모와 영리한 머리는 타고 났으나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못해 세상을 원망하던 영미에게,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동갑내기 선미는 부럽다 못해 질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 질투의 대상인 선미가 좋아하는 우진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때, 묘한 통쾌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단순히 통쾌감을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아 문제지만.
‘이브의 모든 것’에서 허영미가 저지른 악행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영미를 처음부터 탐탁치 않아 하던 송 여사나 선미 앞에서는 독한 본색을 드러내다가 영미를 가여이 여기는 선미 아버지나 우진 등 우호세력 앞에서는 한껏 가련한 척하는 일명 ‘여우짓’은 그렇다 치자. 선미 보란 듯이 우진의 마음을 가로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원래 우진이 선미와 사귀던 사이는 아니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학교 방송제에서 보조 MC에 뽑힌 선미에게 아버지의 접촉사고를 부풀려 전하며 2부 MC 자리를 차지하거나, 우진과의 사이를 반대하는 송 여사를 꺾기 위해 우진의 아이를 낙태했다고 거짓말하며 우진을 차지하는 모습은 불편했다.
선미와 함께 MBS 공채 아나운서로 뽑히고 난 뒤에는 악행의 정도가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선미의 3분 스피치 원고를 찢어버리고, 선미가 뉴스 생방송을 진행할 때 몰래 휴대폰을 넣어 방송사고가 나게 만들고,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선배 아나운서 유주희(김정은)의 자동차 브레이크에 손을 대 사고를 일으키는 수준까지 가버리니까(다행히 다리만 다친다). 아나운서가 되고 난 후 지고지순하게 자신을 아껴주는 우진을 차버리고 선미의 남자이자 MBS 회장 아들인 윤형철 이사(장동건)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건 애교 수준이랄까. 서브 주인공, 사연 있는 악역을 좋아하는 병이 있는 나지만, 그래도 ‘이브의 모든 것’의 허영미를 쉽게 ‘쉴드’ 치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미보다 영미에게 눈길이 갔던 건 (김소연의 후덜덜한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버프’가 너무 심한 선미보단 입체적인 욕망이 있는 영미를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특히 아나운서가 된 이후 선미와 영미의 능력 차는 누가 봐도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도 선미에겐 운이 뒤따른다. 영미가 맹장이 터져 수술을 하는 바람에 7시 뉴스 앵커 대타를 맡게 된 선미가 아동 유괴범 소식을 전하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정말 나쁜 놈들이에요”라며 분노하는 장면은 정말 지금 다시 봐도 실소를 금치 못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런 선미에게 시청자들이 공감하면서 정식 앵커 자리를 꿰차게 되니, 내가 영미라도 억울해 미치고 팔짝 뛸 것 같다.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던 시기에 우연한 자동차 접촉사고로 만난 학교 선배가 MBS 회장 아들 윤형철인 것도, 내부 자체 평가에서 영미가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음에도 시청률이 높다는 빌미를 들어 형철이 선미를 아침 프로그램 진행자로 밀어주는 것도, 현실에서 영미 처지에 놓였다면 질투로 복장이 터질 만하다. 물론 진선미에겐 장점이 있다. 누가 봐도 밝디밝고, 심성이 선하고 솔직하다는 것. ‘돈이 다리미’라는 말처럼 사랑받고 유복하게 자랐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한둘일까. 선미나 우진도 편부·편모 슬하에서 자란 상처가 있음에도 남을 진심으로 대하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다잡고 자랐잖아?
20년 전 방영 당시에는 권선징악형 결말이 선호되던 때라 운 좋고 착한 주인공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운이 좋아 보이는 그 사람에게는 운이 따를 만한 무언가를 갖추고 있다. 실력은 떨어지지만 오랜 시간 한결 같은 선한 모습으로 선미가 아나운서실의 좋은 평판을 얻었던 것처럼. 영미가 독기를 아주 조금만 빼고 사람들을 대했다면 굳이 악행을 저지르거나 남을 이용하지 않고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니 노력 이상으로 운이 좋은 것 같은 당신 주변의 누군가가 질투나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면 잘 생각해보라. 20~30대가 지나고도 계속 그 사람이 운이 좋다면 그것엔 어느 정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질투해 헐뜯기보단 가까이해서 얻는 이익이 많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잖아요?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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