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흔히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며,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드라마를 볼 때면 가장 먼저 작가의 이름을 눈여겨본다. 신뢰가 가는 이름들이 있다.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김수현 작가, 노희경 작가, 박연선 작가 등의 이름이 내겐 그랬다. 김은숙 작가는, 내 주변에서는 호불호가 꽤 있는 이름이지만 나는 ‘그래도 김은숙’이란 믿음이 있었다. 정말 내 취향이 아닌 구석이 많지만 결과적으로 재미는 있다는 믿음. 그런데 요즘 ‘더 킹: 영원의 군주’(‘더 킹’)를 보면서 15년 넘게 쌓아온 그 믿음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이미 온갖 언론이 앞다퉈 ‘더 킹’의 형편없음을 논하고 있으니 구태여 덧붙이진 않겠다. 하지만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싶은 PPL 범벅 장면들을 보다 보니, 김은숙 작가의 2008년작 ‘온에어’가 저절로 생각났다.
한국 드라마에서 PPL(특정 제품을 노출시킨 간접광고)은 필요악이고 김은숙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PPL이 차고 넘치긴 했지만, 그래도 ‘온에어’에서는 ‘더 킹’에서처럼 양복 상의에서 포장김치를 꺼내며 “고구마엔 김치죠” 하는 뜬금없는 장면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떡으로 쌈을 싸 먹는 고깃집 PPL을 하면서도 자연스레 “네 형도 냉면집 같은 거 말고 이런 거나 하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대사와 함께 상황에 맞춤하게 PPL을 녹여냈단 말이다.
‘온에어’는 드라마 왕국인 대한민국에서 작가, PD, 배우, 매니저 등 다양한 연예계 종사자들이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드라마다. ‘국민요정’이라 불리는 톱스타 오승아(김하늘), 오승아가 데뷔 전 사기당하는 것을 막아주며 인연을 맺었던 기획사 대표 장기준(김범수), 4작품 연속 흥행시킨 스타 드라마 작가 서영은(송윤아), 서울대 법대 출신의 PD 이경민(박용하)이 중심인물로, 이들이 모여 ‘티켓 투 더 문’이라는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을 그야말로 징글징글하게 보여준다. 왜 징글징글하냐, 모든 인물이 한 회차도 빼지 않고 징글징글하게 싸우거든. 안 그래도 김은숙 작가의 작품들은 인물들 간의 강렬한 ‘티키타카’ 대사가 특징인데, ‘온에어’는 배틀 수준의 ‘티키타카’ 향연이 펼쳐진다.
“작가님, 내 손으로 내동댕이쳤어도 나 연기대상 받은 배우예요. 내가 아무리 연기를 못해도 이 바닥 짬밥 7년에, 내 영화 총 관객수 900만이고, 내 얼굴 안 박힌 CF 별로 없고, 내 드라마 평균 시청률 30% 넘어요. 이게 나예요. 연기력 하나로 다 싸잡히기엔 좀 억울해서요. 분명 내가 가진 다른 무언가도 있단 얘기거든요.”
“다른 무언가가 뭔데요? 이쁜 얼굴? 잘빠진 몸매? 대학 졸업장? CF 이미지? 할 말 다하는 그 입? 이 바닥 짬밥 7년에 가진 게 고작 그것뿐이라면 지금의 오승아 씨는 바닥이에요. 오승아는 안 늙어요? 여배우에게 가장 무서운 건 스캔들이 아니라 세월이에요. 아까 그거 다 합쳐도 연기력 없으면 그거 하나로 다 싸잡혀야죠.”
오승아와 서영은이 주고받는 이 대사만 봐도 ‘후덜덜’이다. 충고랍시고 쓰게 내뱉은 서영은 작가의 말에 “연기력 없는 배우나 깊이 없이 작품 쓰는 작가나, 뭐가 다른데요?”라고 되갚는 오승아의 말은 또 어떻고. 입에 칼을 문 듯한 저 대사들에, 배우들의 차진 연기가 더해지면서 ‘온에어’는 한층 매력적인 작품이 되었다. 이런 배틀을 너무 자주, 드라마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선보이는 바람에 기가 빨릴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에어’는 재밌었다.
드라마 제작 관행은 물론 연예계에서 벌어지는 비리, 한순간에 사랑이 독으로 변하는 스타와 팬의 관계, 대중성과 작품성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 등 다양한 이야기를 녹아내면서도 오승아-장기준, 서영은-이경민 커플 사이의 로맨스를 잘 풀어내 시청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김은숙 작가가 주인공 서영은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해 ‘명대사만 있고 깊이가 없다’ ‘PPL이 너무 많다’ 등 자신의 단점을 대놓고 고민하게 만드는 모습들도 의미가 있었고.
‘파리의 연인’부터 ‘미스터 션샤인’에 이르기까지 김은숙 작가는 꾸준히 남녀의 로맨스를 그리면서도 자칫 어처구니없어 보일 수 있는 그 판타지적 로맨스를 잘 표현해가며 시청자들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인기가 많은 만큼 PPL도 많았지만 그럭저럭 재기 넘치게 소화해왔었다. 심지어 ‘온에어’에선 장기준의 입을 빌어 “배우가 대사를 읊기도 낯뜨거울 만큼 노골적인 PPL은 안 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었는데(!), 왜 지금 ‘더 킹’에선 그게 안 될까? 개인적으로 ‘온에어’를 여러 번 재시청한 입장에서, 지금의 김은숙 작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작가님, ‘온에어’ 다시 보시고 그때의 마음을 떠올려 주세요. 믿고 보는 작가 리스트에서 작가님 이름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요.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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