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주입식 교육의 성과(?)로 외우고 있는 것들이 있다. 전 국민이 운율 맞춰 노래하는 구구단이나 ‘태정태세 문단세~’로 시작되는 조선 왕 계보도 같은 것들. 미술 쪽으로 옮겨가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는?’라고 묻는다면 긍재 김득신은 단번에 안 나올지라도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이름은 십중팔구 맞추는 것도 주입식 교육의 성과일 것이다. 3대 풍속화가가 아니라 그냥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화가를 물어도 비슷한 답이겠지만.
2008년 방영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그 인지도 짱짱한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게다가 발칙한 상상을 더한다. 김홍도에 비해 알려진 행적이 적은 신윤복, 그가 사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소설가 이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바람의 화원’은 유명세에 비해 역사에 기록된 것이 적은 화가들에 주목했다. 현대에서는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로 추켜세우지만 김홍도와 신윤복은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이라 해도 그 신분의 제약으로 인해 그림은 귀하게 여겨도 화가는 ‘환쟁이’라 천대하는 아이러니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기록 또한 적을 수밖에 없다.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로도 활동했던 김홍도마저 생몰년도가 불분명한데, 그보다도 기록이 적은 신윤복은 어떻겠나.
유독 여성을 많이 그렸던, 베일에 쌓인 화가 신윤복이 실은 여자였을 거라는 상상을, 대중문화에서 놓칠 리 없다. 여기에 사도세자를 추존하려는 정조와 그를 막으려는 정순왕후 세력의 대립과 그에 얽힌 그림과 화원들의 생사 등을 추리극으로 풀어낸 것이 ‘바람의 화원’이다.
화원이 되고자 도화서의 생도로 있는 신윤복(문근영)은 도화서 밖에서 자유로이 그림을 그리는 ‘외유사생’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다 정인을 만나기 위해 은밀히 외출한 정순왕후(임지은)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 이를 발견한 정순왕후가 윤복을 잡으라 명하는 것은 당연지사. 윤복이 그린 그림(‘기다림’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단번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다. 장차 왕실의 지엄함을 드높이는 그림을 그려야 할 예비 화원이, 송낙(승려가 쓰는 모자)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여인을 그림 정중앙에 떡하니 그려 놓은 것이다. 원로 화원들이 이 망측한 춘화(!)를 그린 생도를 잡아야 한다며 그 색출자로 불러들이는 것이 10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묘향산으로 쫓겨간 단원 김홍도(박신양)다. 김홍도와 신윤복, 대략 1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짐작되는 천재와 천재를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엮는 것이다.
‘바람의 화원’을 보는 재미는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라고만 알고 있었던 교과서와 미술관 속 김홍도와 신윤복, 그리고 그들의 그림을 현실로 생생하게 소환하는 데 있다. 윤복이 외유사생에서 그린 ‘기다림’이란 그림을 도화서 원로 화원들과 김홍도가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옛날 미술 선생님도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들려주었으면 얼마나 미술시간이 즐거웠을까 싶을 정도. 신윤복의 ‘단오풍정’ 풍경이 생생하게 3D로 펼쳐지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다.
이후에도 ‘바람의 화원’은 정조(배수빈)가 백성들의 삶을 알고 싶다며 두 화원에게 ‘동제각화(同題各畵)’를 청하며 김홍도의 ‘주막’과 신윤복의 ‘주사거배’, 김홍도의 ‘빨래터’와 신윤복의 ‘계변가화’ 등이 인물들의 입을 통해 다채로운 해석이 곁들여지며 등장한다. 그림을 1도 모르던 사람들도 자연스레 김홍도와 신윤복 작품의 매력에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이외에도 김홍도의 ‘송하맹호도’와 ‘황묘농접도’ ‘씨름’, 신윤복의 ‘상춘야흥’ ‘월하정인’ ‘춘색만원’ ‘이부탐춘’ ‘전모를 쓴 여인’ ‘쌍검대무’ 등이 화면을 수놓는데, 유난히 ‘때깔’이 좋았던 ‘바람의 화원’의 영상미에 이와 같은 명작들이 가미하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남장여자’라는 설정은 그간 여러 드라마에서 인기가 좋았던 설정인데, ‘바람의 화원’에서도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정 하나만으로 다양한 긴장감이 생긴다. 그 중 윤복이 처음 눈길을 주었던 아름다운 기생 정향(문채원)과의 관계는 그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비록 윤복은 여자의 몸이지만 뛰어난 가야금 실력을 지닌 예인이자 윤복이 가질 수 없는 여인의 삶을 가진 정향을 동경하듯, 마음에 품게 된다. ‘닷냥커플’이라 불리던 이들에 대한 팬덤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애초 후보에도 없었던 그해 SBS 연기대상에서 최초로 베스트 커플상을 수상했다니까.
윤복과 정향의 관계에 한층 긴장감을 불러 넣는 것은 재미나게도 남자 주인공인 김홍도가 아니라 정순왕후파의 행동대장 격인 시전행수 김조년(류승룡)이다. 악역 포지션에 속한 김조년은 천민 출신이지만 부단한 노력 끝에 탐미안을 가지게 된 남자. 그림을 대하고 정향을 대하는 김조년의 자세는 신윤복의 그것과 비교되며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그러면서 점점 홍도-윤복 커플을 지지해야 하는 애초의 의도와 달리 윤복-정향 커플의 지지가 커지지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김홍도여).
후반부로 갈수록 텐션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바람의 화원’은 글로만 배웠던 뛰어난 화가들의 그림 세계에 자연스럽게 감응하고 젖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귀한 드라마다. 영상과 OST, 설정과 배우진의 탄탄한 연기의 하모니와 함께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을 즐겨보자.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를 뛰며 남정네들은 씨름을 하던 우리 조상들의 단오 풍정들을 상상해보면서.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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