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제약·바이오 시장에 뜨거운 키워드 중 하나는 ‘조건부 허가’다. 증권가에서는 코로나19 치료제를 비롯한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바이오 기업들에게 조건부 허가 가능성이 있다며 이를 호재라고 평가한다. 조건부 허가는 중대한 질병 치료제를 대상으로 기존 치료법이 없거나 기존 치료보다 임상적 유의성이 클 때 임상3상을 추후 진행하는 조건으로 의약품 판매를 우선 허가해주는 제도다. 조건부 허가가 나오면 주식 시장은 들썩인다. 치료제 등장에 대한 반가움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기업 가치가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건부 허가의 의미를 낮게 평가한다. 조건부 허가된 의약품의 임상3상 진행이 하염없이 지연되거나 시장에서 외면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아 뒤늦게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사례가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자자를 비롯한 환자들이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이다.
국내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면서 조건부 허가 이야기도 덩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업체가 직접 거론하거나 증권가에서 조건부 허가 신청이 예상되는 기업을 언급하며 실적에 영향을 미칠 거라고 전망하는 식이다. 대표적으로 지난달 20일 이뮨메드는 기자회견에서 염증성 바이러스질환 치료제 바이러스억제물질(VSF)을 코로나19 환자들에게 투약한 결과를 발표하며 “임상 2상을 마치고 결과를 식약처에 제출해 조건부 허가를 받으면 VSF를 유통할 수 있다. 식약처가 협의를 빠르게 해준다면 7월 이후부터 정식 약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한양행 비소세포 폐암 치료제 신약 후보물질 ‘레이저티닙’에 대한 조건부 허가 신청 여부를 두고도 추측성 이야기가 난무한다. 유한양행은 오는 29일 열리는 미국 임상종양학회에서 레이저티닙의 단독투여 임상2상과 병용투여 임상1b상 결과를 발표할 예정인데, 만약 기존 치료법으로 국내 허가를 받은 타그리소보다 개선된 효과를 나타내면 조건부 허가 신청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회사 차원에서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시장에서 조건부 허가가 어려울지 쉬울지 전망하는 모양새”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관계자는 “조건부 허가는 당연히 필요한 제도다. 하지만 조건부 허가 신청과 허가를 하나의 마케팅으로 활용하는 사회적인 현상이 우려된다”면서 “조건부 허가를 받으면 우선은 사랑받는 의약품이 된다. 다른 기업도 이를 모티브 삼아 허가 신청을 고려하는데 나중에 필요 없는 약이나 문제 있는 약으로 판단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식약처가 바이오 의약품 시장을 키우기 위해 산업적인 측면을 고려해 조건부 허가를 많이 내준 탓도 큰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 임상의학과 전문의도 “조건부 허가 문제의 핵심은 식약처에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허가·심사에 의사가 관여하지 않아 외국보다 조건부 허가를 받기가 쉽다. 식약처는 허가가 목적이 아닌 주가를 올리려는 기업을 걸러내야 하는데 식약처가 규제 완화 등을 내세워 부추긴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실제로 조건부 허가 신청이 빈번한 세포 치료제의 경우 조건부로 시판 허가를 받았다가 허가 취소된 의약품이 적지 않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에 따르면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14개 의약품이 조건부 허가를 받았지만 그중 4개 의약품이 허가가 취소됐다. 가령 2007년 비소세포폐암을 대상 질환으로 한 이노메디시스의 세포치료제 ‘이노락’은 효과를 입증하지 못해 조건부 허가 5년 만에 시장에서 퇴출됐고, 엔케이바이오가 2007년 조건부 허가받은 ‘엔케이엠주’는 임상3상이 무기한 연기되다 허가 취소됐다.
심사를 담당하는 식약처와 제약사가 조건부 허가 시 임상3상 기한을 협의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적인 규제는 없다. 이 때문에 조건부 허가된 국내 개발 신약 가운데에서도 임상이 무기한 지연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통상적으로 임상3상에는 3년의 시간이 걸린다. 앞서의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관계자는 “조건으로 둔 기한이 업계의 사정에 따라 연장되는 경우가 많다.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치료제를 사용하는 환자들이 늘어나는 셈”이라고 말했다.
가령 CJ제일제당의 ‘슈도박신주’는 2003년 조건부 허가를 받았지만 임상자료를 제출하지 못해 2010년 허가 취하됐다. 동아에스티가 2015년 조건부 허가받은 ‘시벡스트로정’은 아직 생산·판매 실적이 없고, 2016년 한미약품의 표적 항암치료제 ‘올리타정’도 2016년 임상시험 진행 어려움 등으로 개발이 중단됐다.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케이주’는 2017년 조건부 허가를 받았지만 세포 성분이 뒤바뀌었다는 점이 뒤늦게 알려져 지난해 7월 허가 취소됐다.
환자의 치료 기회 확대를 위해 만들어진 조건부 허가 제도가 하나의 마케팅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으려면 결국 정부의 책임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의 임상의학과 전문의는 “우리나라는 조건부 허가를 받고 끝인 경우가 많다. 매우 제한적으로만 의약품을 조건부 허가해야 한다”며 “식약처 내 의사 등 허가·심사 인력을 늘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관계자도 “식약처는 조건부 허가 입증 조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제약회사에 단호한 조치를 내릴 필요도 있다”고 했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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