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스승의 날이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랜선수업’으로 선생님을 만나고 있으니,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달아드리고 ‘스승의 은혜’를 부르는 풍경은 보지 못할 터다. 아,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로 카네이션도 안 된다고 했지. 하긴 나도 학교를 졸업한지 까마득한 데다 그다지 모범적인 학창생활을 보냈던 것도 아니어서 딱히 찾아뵙고 싶은 선생님은 없다. 하지만 기억나는 드라마 속 선생님은 있다. ‘천사들의 합창’의 히메나 선생님.
‘천사들의 합창’은 우리나라에서 유일무이하게 방영한 멕시코 어린이 드라마로, 1989년 KBS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까지 여러 차례 재방영하며 인기를 끌었다. 스웨덴 어린이 드라마 ‘말괄량이 삐삐’는 미국 드라마나 스웨덴 드라마나 그게 그거처럼 보였지만, 어린이의 눈에도 멕시코라는 배경은 확연히 달랐다고. 어쨌든 당시 ‘국민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오후 5~6시경 TV에서 울리는 ‘천사들의 합창’의 구슬픈 오프닝곡을 들으며 파블로프의 개처럼 TV 앞에 앉곤 했다. 멕시코의 어느 국제학교 2학년 반을 가르치는 히메나 페르난데스 선생님과 그 반의 아이들이 일으키는 소동을 보며 울고 웃었던 감정이 선명하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거나 어린이가 주인공인 어린이 드라마로는 ‘천사들의 합창’ 외에도 기억나는 작품들이 몇 있다. 나보다 몇 살 많은 이들에겐 ‘호랑이 선생님’이 친숙할 것이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주제가만큼은 지금도 따라 부를 수 있는 ‘꾸러기’와 ‘5학년 3반 청개구리들’도 있다. 하지만 ‘천사들의 합창’만큼 각 인물들의 캐릭터가 확연하고 개성이 넘치는 어린이 드라마는 드물다.
젊고 아름다우며 천사 같은 마음씨로 어린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히메나 선생님을 필두로, 하얀 장갑을 끼고 다니며 오만하고 도도하게 구는 마리아 호아키나(꼭 미들네임까지 불러줘야 한다), 마리아 호아키나를 짝사랑하지만 항상 무시 받고 슬퍼하는 흑인 소년 시릴로, 정비공 아빠와 똑 닮은 큰 덩치를 자랑하지만 노트 정리는 빵점인 우직한 하이메, 얼굴의 반을 덮는 안경을 쓰곤 매사 장난을 치는 익살스러운 발레리아, 발레리아의 충직한 남자친구이자 곱슬머리가 귀여운 유대인 소년 다비드, 마리아 호아키나가 반에서 유일하게 인정할 만큼 모범적인 반장인 다니엘, 언제나 빵을 먹으며 “그건 너무 낭만적이야~”를 외치는 라우라, 악질적인 장난과 괴롭힘으로 반 친구들의 미움을 사는 파블로와 그의 착한 동생 마르셀리나, 그리고 부모님이 헤어져서 자주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카르멘, 언제나 아이들을 “우리 비둘기들”이라 부르며 사랑해주었던 학교 관리인 페르민 할아버지….
캐릭터가 확연하고, 각 캐릭터에 부여된 서사가 당시 멕시코의 사회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어린이 드라마 특유의 교훈적인 내용마저도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며 감동하게 만드는 작품이 ‘천사들의 합창’이었다. 부잣집 백인 소녀인 마리아 호아키나와 가난한 흑인 소년인 시릴로 사이에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그랬다. 마리아 호아키나는 걸핏하면 시릴로를 ‘검둥이’라 부르며 무시무시한 인종차별을 일삼았고, 가난한 시릴로는 학교의 중요한 손님이 오시는 날에 새 구두 대신 값싼 고무 샌들을 신고 나와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특히 우여곡절 끝에 마리아 호아키나의 생일파티에 참석한 시릴로가 자신의 꽃다발을 무참히 내동댕이치는 마리아 호아키나를 보며 지었던 그 슬픈 표정이란.
인종차별과 빈부격차 문제가 마리아 호아키나와 시릴로를 중심으로 불거졌다면, 사이가 나쁜 부모 때문에 상처받는 역할은 웃고 있어도 어딘지 슬퍼 보이는 카르멘과 파블로가 혀를 내두를 만큼 악동이었던 전학생 마리오가 맡았다. 헤어져 따로 사는 부모 때문에 슬퍼하는 카르멘 때문에 당시 기사도 본능이 분기탱천 일었던 ‘국딩’ 남자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니까. 천하의 악동 마리오도 기억에 남는다. 일찍 엄마를 잃은 마리오는 출장으로 바쁜 아빠 대신 사이 나쁜 새엄마와 지냈는데, 그 새엄마가 툭하면 내뱉던 “그 아이는 내 아들 아니에요”라는 대사는 어린이일 당시에도 서늘한 감정이 들었을 정도.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들의 세계지만 그 안에는 크고 작은 세상만사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들의 입장에서 함께해준 스승이 히메나 선생님이다. 교장선생님이 자주 “선생님은 너무 어려서 애들한테 물러요”라고 퉁박을 줄 만큼 어린 나이(아마도 20대 초반)지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아이들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에 세심히 관심을 주던 친절한 선생님. 구제불능일 것 같은 말을 내뱉고 악동짓을 저질러도 아이들에게 함부로 소리치지 않는 선생님. 물론 히메나 선생님의 흰 리본으로 묶은 반머리와 청순 가련해 보이는 퍼프 소매의 흰 원피스 차림은 지금이나 그때나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지만, 당시 준비물을 자주 잊었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뺨을 치는 담임 선생님(놀랍죠? 하지만 80, 90년대에 가끔 있었던 일)을 만났던 나로서는 히메나 선생님 같은 선생님과 생활하는 멕시코 아이들이 그토록 부러울 수 없었다고.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한글을 창제하며 온 백성의 스승이 되었던 세종대왕의 탄신일이기도 하다. 재미난 건 멕시코도 오늘이 스승의 날이란다. 히메나 선생님이 카르멘 부모의 불화나 시릴로의 가난을 해결해 줄 순 없었지만, 그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나는 너의 친구야”라고 다정히 말해준 것만으로 그 아이들의 시름은 조금이나마 잊혔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 있을 히메나 선생님 같은 다정한 선생님들, 올해는 아이들의 마음을 랜선 통해 겨우 확인하겠지만 내년에는 모두가 함께 교실에 어울려 웃고 있기를. 아, 하지만 퍼프 소매 흰 원피스와 흰 리본 묶은 반머리는 안됩니다. 레트로 물결 타고 곱창밴드도 돌아왔다지만 그건 안 되는 거예요.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올드라마]
엄마는 왜 가슴에 빨간약을 발랐을까 '꽃보다 아름다워'
· [올드라마]
짜파게티 먹으며 '짝'을 챙겨보던 90년대 일요일 감성
· [올드라마]
만화 같은, 그래서 더 설득력 있는 '신입사원'
·
'아직 날개도 못 폈는데' 신규 LCC 4월 도산설 현실화되나
· [올드라마]
'시티홀', 우리가 꿈꾸는 정치인은 드라마에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