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 아이폰 SE가 출시됐다. 지금 이 글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내 손에는 아직 아이폰 SE가 없다. 아마 글을 마무리할 즈음 아이폰 SE가 도착할 것 같다. 그럼에도 먼저 이야기를 시작해본다. 그럴 수 있는 게 바로 이 아이폰 SE가 안 써봤지만 써본 것 같은 제품이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아이폰 SE는 아이폰 8을 뼈대로 새로운 프로세서를 더한 제품이다. 아이폰 8이 출시된 지도 2년이 넘었고, 새로운 아이폰으로 바꾸고 싶지만 터치ID를 고집하는 이들이 가장 기본적인 아이폰 SE의 타깃층이다. 그래서 따로 제품을 설계하거나 디자인을 바꿀 필요 없이 기존 디자인 그대로 프로세서만 최신인 A13 바이오닉으로 바꾸어 출시했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가격이다. 사실 이 디자인은 벌써 아이폰 6부터 6s, 7, 8까지 4세대를 이어왔다. 물론 매년 적지 않은 변화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형제 모델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닮아 있다. 자칫 프로세서 하나만 바꿨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반응은 정반대다. 가격 때문이다.
아이폰 SE는 55만 원부터 시작한다. 저장공간이 64GB 모델이다. 이 정도로도 쓸 수는 있는데 보통 128GB를 선호한다. 이 128GB가 62만 원이다. 아, 싸다는 이야기는 그냥 가격이 저렴하기만 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제품의 디자인, 완성도, 성능 등의 모든 요소를 감안해서 하나도 빠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폰 8의 느낌 그대로
도입부를 쓰다가 방금 제품이 도착했다. 첫 인상은 패키지부터 제품까지 이야기하지 않으면 어떤 제품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아이폰 8에 쓰던 정품 케이스가 그대로 맞는다. 외관은 딱히 할 이야기가 없다. 알루미늄의 까끌까끌한 느낌도 똑같고, 뒷판의 매끄러운 유리, 그리고 무선 충전도 똑같다.
오랜만에 만난 터치ID는 반갑다. 이게 옛날 기술이어서 사라진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기기를 쓰겠다는 의지를 홈 버튼에 넣어 화면을 깨우고, 암호를 풀고, 잠금을 해체하는 일련의 과정이 그대로 이어지는 이 지문 인식 장치는 스마트폰 보안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었다. 특히 마스크가 일상화되는 요즘 터치ID는 더 반가운 것 같다.
화면은 LCD다. 흔히 LCD라고 하면 OLED보다 못하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폰 SE에 들어간 LCD는 OLED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물론 검은색 표현은 OLED와 비교할 수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빛샘이나 검은색 표현이 튀지 않는다. 아이폰 11 프로 맥스를 쓰고 있지만 아이폰 SE 화면은 이질감이 없다. 이 디스플레이는 색 표현 범위도 넓고, 디더링 방식으로 픽셀을 매만져서 HDR 콘텐츠도 표현한다. 유튜브에서는 안 되지만 애플의 콘텐츠와 넷플릭스는 10비트 HDR10과 12비트 돌비 비전 콘텐츠도 재생할 수 있다.
해상도는 괜찮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 1366x750 픽셀 해상도를 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말도 안 되는 해상도라는 건 맞다. 하지만 해상도가 낮아 보이지는 않는다. 애플이 기준으로 하는 픽셀 밀도는 300ppi이고, 아이폰 SE의 4.7인치 디스플레이에서는 이 해상도가 325ppi이기 때문이다. 글자가 흐릿해 보이거나 곡선에 각이 져 보이지 않는다. 아쉬운 건 그저 ‘왜 해상도가 낮을까?’라는 불편한 마음뿐이다.
다만 화면 크기는 확실히 작다. 웹페이지나 넷플릭스의 자막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말하는 수준의 ‘작다’는 아니다. 그것보다 길이가 어색하다. 위아래로 화면을 가득 채워버린 요즘 스마트폰들의 시원함이 아쉽다. 사실 대부분의 콘텐츠는 16:9에 맞춰져 있지만 16:9는 이제 스마트폰 화면으로 너무 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기존에 아이폰 8을 쓰고 있었다면 이건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칩 하나 바꾼 차이? 프로세서가 만들어내는 경험 차이
가장 중요한 건 칩이다. 아이폰 8은 아이폰 X과 똑같은 A11 바이오닉 프로세서를 쓴다. 아이폰 SE에는 A13 바이오닉 칩이 들어간다. 아이폰 11, 아이폰 11 프로에 쓰는 것과 같은 칩이다. 두 세대를 넘어서는 성능이다. 이 칩 사이에는 앱 처리 속도의 영향도 있지만 실제로 큰 차이는 그래픽 성능, 그리고 이미지 처리와 인공지능 기술에 있다. 애플이 아이폰 8을 단종하면서 아이폰 SE를 꺼내 놓은 것도 새로운 앱을 이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더 많이 깔아놓기 위해서다.
이 A13 칩은 현재 가장 빠른 프로세서 중 하나다. 값이 3배가 넘는 아이폰 11 프로에도 같은 칩이 쓰이고 가장 빠른 안드로이드 프로세서와 비슷하거나 더 빠르다. 뜯어보면 아이폰 11 프로와 기본 반도체 구조는 같고, 메모리는 4GB에서 3GB로 1GB 적다. 흔히 쓰는 안투투 벤치마크 테스트로 아이폰 11 프로와 비교해보면 10% 정도의 점수 차이가 나는데 GPU의 그래픽 처리 능력이 조금 낮게 나온다.
아무래도 해상도가 더 낮기 때문에 그래픽 처리에 부하가 적고, 그만큼 GPU의 일부 성능과 메모리를 낮춘 것으로 보인다. 대신 처리해야 하는 픽셀 수가 적기 때문에 화면에 그려지는 결과물, 그러니까 프레임 수나 화질 등은 차이를 느끼기 어렵다. 애초에 성능을 크게 낮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실제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사실 아이폰 8에 쓰인 A11 바이오닉 칩도 지금 쓰기에 큰 무리는 없다. 분명 아이폰 SE는 더 빠르게 움직이긴 하지만 아마도 아이폰 8이 느려서 아이폰 SE에 손이 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최근 모바일 프로세서의 기술 흐름도 단순히 CPU와 GPU 성능이 전부를 말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머신러닝과 증강현실 콘텐츠를 처리하고, 사진과 영상을 더 잘 다듬어내는 등 단순히 처리 능력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 차이들이 있다.
아이폰 SE의 사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아이폰 8과 아이폰 SE의 카메라는 하드웨어가 같다. 하지만 사진 결과물은 차이가 있다. 바로 프로세서 때문이다. 아이폰 11의 특징은 A13 바이오닉 프로세서의 이미지 처리 능력이 대폭 향상됐고, 기본적으로 셔터를 한 번 누르면 10장 남짓한 사진을 찍어 한 장으로 합치고, 야간 모드나 딥 퓨전 등 화질 향상 기술을 위해 수 천 장의 사진을 찍어서 합성하고 인공지능 기술로 손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프로세서의 이미지 처리 능력에 달려 있다. 카메라 하드웨어는 영상 신호만 제공하는 것이고 결국 이를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프로세서의 능력이기 때문에 아이폰 SE의 카메라는 확실히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준다. 물론 아이폰 11과 완전히 같지는 않고 노이즈나 색이 약간 달라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이미지의 분위기나 색 톤은 아이폰 11의 카메라와 비슷하다.
#50만~70만 원대 독보적 기기
물론 더 많은 카메라 화각과 딥 퓨전, 야간 모드 등 카메라 센서 자체와 관계있는 기능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면 아이폰 11로 가는 편이 맞다. 사진 외에도 더 넓은 디스플레이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면 아이폰 11, 혹은 아이폰 XR이 더 어울릴 수 있다.
아이폰 SE는 보급기, 중급기 등의 수식어로는 설명하기 다소 어려운 제품이다. 분명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고성능 프로세서를 어느 중급기까지 적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아이폰 SE는 기존의 제품 급을 가르던 방식과 확연히 다르다. 성능은 현재 최고 수준이고, 제품의 소재나 디자인, 마감도 애플의 플래그십 그대로다.
주류 제품인 아이폰 11 시리즈와 디스플레이, 카메라 등의 경험으로 구분도 명확하다. 하지만 여전히 터치ID와 작은 크기, LCD 화면을 원하는 수요가 있고, 그 소비층을 적절한 가격으로 만족시킬 만한 제품이다. 꼭 성능이 아니어도 제품을 가를 수 있고, 경험으로 차별화를 둘 수 있다는 애플의 자신감, 또 소프트웨어 기술과 생태계의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다.
극단적인 평가는 조심스럽지만 아이폰 SE의 시장성, 상품성, 가치는 흠잡을 데가 없다. 새롭지 않고, 신기한 것도 아니지만 현재 살 수 있는 50만~70만 원대 스마트폰 중에서 아이폰 SE와 견줄 만한 제품은 없다.
최호섭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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