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3년 전, 베를린에서의 생활을 시작할 때 나의 다짐은 이랬다. ‘어차피 3년만 살다 갈 거니까 최대한 짐을 늘리지 말자. 언제 떠나도 될 만큼 정리정돈이 잘 된 상태로 지내자.’ 한국에서 해외 이사를 위한 짐을 싸면서 일주일 내내 ‘버리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했던 그 당시, 한동안은 다짐대로 지냈다. 어느 집이나 짐정리 하다 ‘멘붕’이 오기 일쑤인 각종 ‘서랍장’ 안에도 서랍마다 항목별로 나누고 잡동사니로 뒤섞인 블랙홀이 되지 않도록 유지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이곳의 삶이 익숙해지고 한국에서 짐정리 하며 고생했던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물건이 쌓여갔다. 항목별로 정리된 서랍장 안에도 ‘항목 외’ 물건들이 하나 둘 끼어들어 또 다시 블랙홀에 가까워져 갔다. 꼭 필요해 구매한 물건들도 있지만, ‘여기서 사는 게 남는 것’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해가며 구매한 항목들도 적잖이 있는 게 사실. 세탁실 내 창고는 물론이고 지하의 큰 사이즈 창고에도 물건이며 이사 때 사용하려 모아둔 빈 박스들로 여유 공간이 없을 지경이다.
최근 귀국 준비를 하면서 가져갈 짐을 체크하다 보니, 컨테이너 용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버리거나 처분할 것들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한국에서 가져왔으나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지하 창고에 그대로 있는 물건도 있고, 여기 생활 방식에 맞추느라 기존의 것이 있음에도 새로 교체한 것들도 있어서 상태는 멀쩡하나 가져갈 필요가 없는, 혹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들이 많았다. 철 지난 의류부터 하나 둘 정리에 들어간 나에게 독일인 친구가 말했다. “나한테 줄 거나 팔 게 있으면 알려줘. 보고 필요한 거면 내가 살게. 코로나 때문만 아니면 플리마켓에서 파는 것도 좋은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장이 다시 열리면 생각해봐.”
그렇다. 여기가 플리마켓, 즉 벼룩시장의 나라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실용적 사고가 강한 독일인들은 쓰지 않는 물건이라도 절대 버리지 않는다. 필요한 사람에게 공짜로 주거나 플리마켓에 매대를 차리고 판매한다. 바꿔 말하면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새 제품만 고집하지 않는단 의미다. 생활 용품부터 의류, 책, 장식품, 대형가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중고거래가 플리마켓에서 이뤄진다. 합리적이고 슬기로운 소비생활이다.
공식적으로 베를린에만 몇 개의 플리마켓이 열리는지 모르겠지만, 관광객에게 가장 익숙한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을 대표로,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플리마켓이 열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일요일에 문 닫은 대형마트의 주차장에서도 열리고, 여러 명이 모이는 마켓 형태가 아니어도 길거리 곳곳에서 중고 물품을 판매하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차에 혹은 여행가방에 손때 묻은 물건을 진열해놓고 종일 손님을 기다린다. 어떤 판매대는 종류가 다양하고 많고 어떤 판매대는 몇 안 되는 물건을 갖다 놓은 경우도 있다. 판매자들의 나이도 어린 아이를 동반한 가족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일부 매대는 중고가 아닌 수제로 만든 새 제품을 판매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세월의 흔적이 드러난 물건이다.
베를린 생활 초기, 구경삼아 플리마켓 체험을 다닐 때 도무지 팔리지 않을 것 같은, 과하게 말하면 줘도 안 가져갈 것 같은 물건까지 ‘판매용’으로 진열한 것을 보고 당황하기도 했다.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의 플리마켓에서 최고 인기품목인 앤티크 식기류나 크리스탈 제품, 각종 장식품을 비롯해 일부 품목은 오래된 느낌 그대로 눈길을 끌었지만, 심하게 낡고 먼지가 수북히 쌓인, ‘쓰레기’로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중고품마저 갖고 나온 심리는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플리마켓에서 많은 것을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자꾸만 가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처음에는 소소한 구경거리를 즐기며 독일인의 생활방식을 느껴보는 재미가 있었다면, 나중엔 진열대를 보며 한 개인의 인생 다큐를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뿐이랴. 같은 장소라 해도 고정 판매자 외에 대부분의 판매자들은 들고 남이 있어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니 지루할 틈이 없다. 장이 끝나 가면 작은 물건을 덤으로 주거나 값을 대폭 깎는 등의 ‘이벤트’도 있다. 나를 당황시켰던 ‘너무 낡은’ 물건들도 나중에는 물건을 진열하고 보여주는 자체를 즐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두 달 가까이 플리마켓이 중단됐지만, 그 전까진 아이를 데리고 동네 플리마켓을 수시로 방문했다. 아이는 처음 플리마켓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맘에 드는 장난감이나 독일어 책을 한두 번 ‘득템’한 뒤 간간이 “책 사러 플리마켓에 갈까”라고 할 정도로 흥미를 느꼈다. 우리 집의 독일어 책 대부분이 플리마켓에서 구매한 것들일 정도다.
지금의 생활 관련 제한 조치가 완화된다 해도 수많은 사람이 접촉하는 플리마켓은 열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귀국하는 그 날까지 플리마켓은 셧다운일 수도 있다. 플리마켓이 오픈한다 해도 친구 조언처럼 중고품들을 들고 나가 판매할 자신은 없지만, 외부 요인으로 선택의 기회마저 없어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없지 않다. 거래는 못 해도 좋으니 플리마켓에 한 번 더 갈 기회가 있기를.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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