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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꽃보다 한양도성! 서울성곽길 백악구간

'사회적 거리 두기' 동참하면서 역사·전망 두루 즐길 수 있어

2020.04.08(Wed) 09:57:45

[비즈한국]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꽃은 만발했지만 꽃구경은 오지 말란다. 코로나19 탓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연장되는 걸 감안하면 당연한 조치다. 그래도 진해와 여의도 벚꽃길에 몰리는 사람들의 마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개학 같지 않은 ‘온라인 개학’으로 집에서 아이들과 씨름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면 멀리 꽃구경 대신 가까운 한양도성 나들이는 어떨까. 숨 쉬기 편한 마스크를 쓰고, 앞뒤 사람과의 거리를 2m 이상 충분히 띄우고서 말이다. 서울성곽길 백악구간은 전망이 좋을 뿐 아니라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사의 역사 현장까지 두루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서울성곽길에서 내려다본 도심 전망. 멀리 꽃구경 대신 가까운 한양도성 나들이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면서 역사 공부도 해보자. 사진=구완회 제공

 

#전망도 즐기고 역사도 배우고

 

조선의 수도 한양은 유교 국가를 세운다는 구상 아래 철저히 계획된 도시였다. 가장 먼저 농사와 토지의 신을 모시는 사직단과 선왕의 신위를 모시는 종묘를 짓고, 다음으로 왕이 살 궁궐이 완성되자 이러한 핵심 시설을 보호할 성곽 축조에 들어갔다. 서울성곽은 서울의 동서남북의 낙산, 인왕산, 북악산, 남산을 잇는 것으로 총 길이는 18.2km에 달한다. 

 

그렇게 서울을 빙 둘러 성곽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만들었다. 이제 서울은 이 문들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세종과 숙종 대에 보수확장 공사를 크게 하면서 서울성곽은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부설하면서 평지에 있던 성곽은 모두 헐려나가고 지금은 산성 구간만 남게 되었다. 그중 백악(북악)구간은 창의문에서 백악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구간이다. 중간에 촛대바위와 숙정문, 청운대, 1.21사태 소나무 등을 거치는 길은 약 4.7km에 이른다. 

 

서울성곽의 시작점인 창의문.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바로 이곳을 통과해서 궁궐로 향했다. 사진=구완회 제공


북대문인 숙정문은 평소에는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금했다. 숙정문을 열어두면 불길하다는 풍수학자의 건의 때문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북대문인 숙정문은 평소에는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금했다. 숙정문을 열어두면 불길하다는 풍수학자의 건의 때문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시작점인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하나다.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이 바로 이곳을 통과해서 궁궐로 향했다. 북대문인 숙정문은 평소에는 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금했단다. 조선의 3대 임금이었던 태종이 숙정문을 열어두면 불길하다는 풍수학자의 건의를 받아들인 탓이었다. 다만 가뭄이 들 때에는 숙정문을 열고 대신 남대문인 숭례문을 닫아 두었다고. 

 

서울성곽은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 확장 공사를 해서 성벽의 돌 크기가 부분부분 다르다. 세종 때는 본래 성벽보다 좀 더 큰 돌로 쌓으면서 사이사이에 잔돌을 넣었고, 숙종 때는 가로세로 2자(약 66cm)의 돌로 아주 네모 반듯하게 쌓았다. 사진=구완회 제공

서울성곽은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 확장 공사를 해서 성벽의 돌 크기가 부분부분 다르다. 세종 때는 본래 성벽보다 좀 더 큰 돌로 쌓으면서 사이사이에 잔돌을 넣었고, 숙종 때는 가로세로 2자(약 66cm)의 돌로 아주 네모 반듯하게 쌓았다. 사진=구완회 제공

 

서울성곽은 성벽의 돌 크기가 부분부분 다른 것에도 역사적 이유가 있다. 처음 서울성곽을 세우고 나서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 확장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돌이 쓰인 까닭이다.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때 만든 성벽은 책가방 절반쯤 되는 크기의 돌을 다듬어 조금 울퉁불퉁하게 쌓았고, 세종 때는 좀 더 큰 돌로 쌓으면서 사이사이에 잔돌을 넣었고, 마지막으로 숙종 때는 가로세로 2자(약 66cm)의 돌로 아주 네모 반듯하게 쌓았다. 후대의 것일수록 돌이 더 크고 네모 반듯하게 쌓은 셈이다. 

 

#조선 시대에서 근현대사까지 역사의 현장

 

서울성곽길 백악구간의 전망은 청운대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곳에 서면 남으로는 경복궁과 세종로, 북으로는 북한산이 펼쳐진다. 여기서 경복궁과 세종로를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아이와 잠시 역사 이야기를 하는 건 어떨까. 국왕이 살았던 궁궐과 궁궐 바로 앞 세종로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관청들에 대해 말이다. 세종로의 옛 이름은 육조거리고, 거기에는 이조(행정안전부), 호조(기획재정부), 예조(외교통상부), 병조(국방부), 형조(법무부), 공조(국토해양부)의 6조 관청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한양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이름을 알아보는 것도 좋다. 4대문은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남대문(숭례문), 북대문(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소문(혜화문), 서소문(소의문), 남소문(광희문), 북소문(창의문)이다. 이중 4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인의예지’에서 따왔다. 하지만 북대문만 무슨 이유에선지 숙청문으로 부르다 중종 이후부터는 숙정문이 되었단다. 

 

촛대바위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제 쇠말뚝설’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촛대바위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제 쇠말뚝설’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다. 사진=구완회 제공

 

서울성곽길 백악구간에는 근현대사의 역사를 품은 곳은 있다. 촛대바위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제 쇠말뚝설’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니 참고하시길. 조금 더 가면 현대사의 어둠이 깃든 ‘1·21사태 소나무’가 보인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인들은 이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그 때 총을 맞은 소나무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인들이 이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그때 총을 맞은 소나무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1·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인들이 이곳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고, 그때 총을 맞은 소나무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여행메모>

 

서울성곽길 백악구간  △위치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문의 02-2133-2657 △관람시간 3~4월/9~10월 07:00~18:00, 5~8월 07:00~19:00, 11~2월 09:00~17:00, 연중무휴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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