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대 국회가 저물고 있다. 20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사상 최초로 2만 건을 돌파했다. 하지만 법안 처리율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30%에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법안만 1만 5000여 건에 달한다. 2개월 후면 20대 국회의원들과 함께 그들이 발의한 계류 법안들도 모두 소멸된다. 비즈한국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경제 관련 현안이 담긴 법안을 골라 입법 배경과 의미를 짚어본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n번방은 아동·청소년·여성의 신상 정보와 성 착취 영상을 공유하기 위해 텔레그램에 개설된 비밀 대화방이다. 분노한 국민은 이들의 신상을 공개해달라는 청와대 청원 글에 서명하기 시작했고, 6일 만에 250만 명이 참여했다.
대다수 국민은 피의자 신상 공개뿐만 아니라 이들을 더욱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원하고 있다. 벌써부터 관련 법 조항을 들어 피의자 범위나 처벌 수위가 죄질에 비해 빈약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정부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관련법 개정에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n번방 사건 재발 금지 3법’을 포함한 관련 법안을 최대한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법제사법위원회에는 국회 재검토가 필요한 법안들이 상당수 계류 중이다.
#성폭력처벌법 피의자는 반드시 신상을 공개해야
국민은 현재 피의자들의 신상 공개를 원하고 있다. 현행 법상 피의자 신상 공개 여부는 성폭력처벌법과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에 따라 결정된다. 성폭력처벌법 제25조에 따르면 검사와 사법경찰관은 피의자가 성폭력범죄를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고, 국민의 알권리 보장·피의자 재범 방지 및 범죄예방 등 공익이 목적일 땐 얼굴, 이름 및 나이 등 피의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 다만 피의자 신분을 공개할 때에는 피의자의 인권을 고려해야 하고 남용해서는 안 된다.
이 법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신상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피의자가 사법부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청소년성보호법 제49조에 따라 법원은 피의자의 사건 판결과 동시에 신상 공개 명령을 선고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법에 피고인이 아동·청소년이거나 그 밖에 피의자의 신상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 될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법원은 피의자의 신상 공개를 거부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이 존재해 피의자 신상이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성 착취물 유포 없이 강요·협박만 해도 처벌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들은 아동·청소년·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물을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 형량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 따라 최대 7년 이하의 징역에 불과하다. 이 조항도 2018년 ‘리벤지 포르노’, 즉 불법 촬영물 등 사이버 성폭력 분야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개정됐다. 당시 불법 촬영과 촬영물의 인터넷 유포에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불법 촬영물을 이용해 피해자들을 협박하더라도, 실제로 촬영물이 유포되지 않았다면 피의자들을 처벌하는 건 현행 법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행위가 성폭력처벌법 제14조 2항에 명시된 촬영물 또는 복제물을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이하 “반포 등”이라 한다)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2019년 1월 윤상직 미래통합당 의원은 성폭력처벌법 일부법률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협박할 목적으로 촬영물이나 복제물을 촬영대상자에게 도달하게 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해 디지털 성폭력으로 인한 2차 피해 방지하자는 취지다. 개정안이 입법됐다면 n번방 운영자들은 성 착취물로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그들에게 추가 요구를 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
이 개정안은 같은 해 7월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됐지만, 복수의 법들과 상충한다는 이유로 국회 본회의에 오르지 못했다. 법원행정처는 “형법 제283조에 협박죄를 규정하고 있어 피의자의 행위가 협박죄로 처벌될 수 있는 데다가, 협박을 목적으로 촬영물을 피해자에게 전달하는 행위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 존재하는 촬영·유통행위죄와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또한 개정안 입법 시 협박한 자도 성폭력처벌법 제42조에 따라 신상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데, 협박죄를 신상 정보 등록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도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성 착취물 재유포·재촬영도 처벌 이뤄져야
성 착취물 최초 유포자뿐만 아니라 이를 재가공하거나 다른 이에게 유포한 자도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복수의 의원들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서 가해자에 대한 설명이 지금보다 더 명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2018년 9월에는 성 착취물 재가공자를 처벌하자는 취지로 성폭력처벌법 일부법률개정안이 발의됐다. 박재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개정안은 성폭력처벌법 제14조 해석상 촬영 대상이 사람의 신체가 아니라, 그 신체의 이미지가 담긴 영상을 촬영·반포한 자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판례를 무효화하고, 재촬영 및 반포 행위를 엄중히 처벌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개정안은 법사위 전체회의 상정을 넘어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2019년 3월 직접 회부됐다. 그러나 심사는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고 현재까지 계류 중이다. 박재호 의원은 “성 착취물 제작, 유통뿐만 아니라 거울 등 다른 물체에 반사된 이미지 또는 모니터에 나타난 이미지를 촬영하는 재가공자 또는 성 착취물 소지자 등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 같은 악순환은 반복될 것이다. 현실에 맞는 디지털 성폭력 양형기준이 새롭게 정립돼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2개월 후인 2018년 11월에는 재유포자 처벌에 대한 대상과 기준을 명확히 하자는 의미로 김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성폭력처벌법 일부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영호 의원은 “불법 촬영물 재유포자 처벌을 취지로 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 제4항, 제5항을 신설하자”고 주장했다. 단순 재유포의 경우 피의자는 제4항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며, 영리 목적이 추가되는 제5항을 위반한 피의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당시 법무부는 “현행 법으로도 재유포자 처벌이 가능하다. 새로운 처벌 규정 신설의 실익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법원행정처 역시 “성폭력처벌법 제14조에 해당하는 피의자가 반드시 촬영물을 촬영한 자와 동일인일 필요는 없다는 판례가 존재한다”고 밝혔다.
김영호 의원실 관계자는 “법사위 법안소위에서 개정안이 심사돼야 우리 주장을 강력하게 표명했을 텐데 그동안 다른 중요 법안들에 밀려 논의되지 못했다. n번방 운영자뿐만 아니라 이후 성 착취물을 반포한 소비자도 운영자와 같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개정안이 통과됐다면 재유포자들을 명확히 처벌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여당에서 n번방 처벌 관련 법안 심사에 중점을 두고 있는 만큼 개정안 통과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웅 기자
rooney@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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