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사랑지상주의를 부르짖는 드라마계에서 연결 못 시킬 관계란 없다. 나이, 성별, 국적, 사회·경제적 격차는 물론 세상(법이나 도덕)이 금지한 사랑,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도 드라마에선 결국은 결실을 맺고 만다. 드라마만 보면 사랑 앞에 그 어떤 장애물도 없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법이 허용하더라도 두터운 관습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랑이 훨씬 격한 반대에 부딪친다. ‘보고 또 보고’가 들고 나온 ‘겹사돈’ 문제가 그랬다.
싹싹하고 야무진 간호사 정은주(김지수)는 밖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똑순이’지만, 집에서는 공주처럼 예쁨 받고 자란 언니 정금주(윤해영)에 치여 자란 ‘미운 오리 새끼’ 신세다. 우연히 소매치기당한 지갑을 찾아준 서울지검 검사 박기정(정보석)과 사랑에 빠져 기정네 집안에서 강력하게 추천하던 레지던트 이승미(성현아)를 제치고 부단한 노력과 절절한 사랑 끝에 어렵디 어렵게 결혼을 승낙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기정의 남동생인 안무가 박기풍(허준호)이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여자가 자신의 언니 금주다! 초등학교 교사인 남동생 정명원(박용하)의 교장선생님이 예비 시아버지 박봉학(이순재)인 건 덤.
‘보고 또 보고’의 겹사돈 소재는 지금이야 막장 드라마에서 즐겨 사용하는 클리셰가 되었지만 방영 당시인 1998~1999년만 해도 파격 그 자체였다. 1990년 민법 개정 전까지만 해도 혈족의 배우자의 혈족과 결혼하는 겹사돈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 게다가 형제와 자매의 서열을 바꿔 놓았기에 동생인 은주가 연인 기정의 남동생 기풍에게는 형수 겸 처제가 되고, 언니인 은주가 연인 기풍의 형 기정에게는 처형 겸 제수씨가 되는, 꼬이고 꼬인 관계다.
한 편이 25~30분 분량인 일일 드라마라지만 ‘보고 또 보고’가 무려 273부작에 달하는 롱런을 할 수 있었던 건 저 꼬이고 꼬인 관계 때문이었다. 아무리 법이 허용한다 해도 내 여동생의 남편이 내 시숙(媤叔)이 되고, 내가 여동생의 아랫동서가 되어 ‘형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면 아찔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애초 기정 어머니 지 여사(김민자)가 은주를 반대했던 이유는 잘나가는 검사인 장남에게 간호사란 직업을 가진 며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런 이유보다 서열 꼬인 겹사돈 관계가 어른들에게는 훨씬 기겁할 일이었으니 시청률은 한층 탄력을 받고, 자연 드라마는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여 ‘늘리고 또 늘리고’라는 비난도 받았다.
사실 ‘보고 또 보고’가 재미났던 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식 간의 노골적인 차별이란 소재가 겹사돈이라는 파격적인 소재 이상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덕분이기도 하다. 금주, 은주, 명원의 어머니인 배정자 여사(김창숙)가 금주에게 보이는 편애는 당시 수많은 형제자매 시청자들의 울분을 사기에 충분했거든. 같은 딸임에도 금주는 공주처럼 오냐오냐 대하고 은주가 하는 행동엔 반사적으로 면박을 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전국의 수많은 둘째들이 은주에게 감정이입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대로 배정자 여사의 모습을 은근히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여러 자식 키워본 부모들이라면 대부분 동조하듯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은 있는 법이거든.
어느 자식이든 애틋하기 마련이겠으나 부모 자식 간의 역학관계는 사람마다 다르다. 가령 배 여사 입장에서 은주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자식들과 달리 훨씬 크게 태어나 극심한 산통을 겪게 만든 아이다. 은주가 태어날 즈음 돌쟁이 금주가 폐렴으로 아프고 가계 또한 궁색해 친정 어머니에게 은주를 보내 키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여섯 살이 되어서야 데려온 은주는 자신이 직접 키운 자식들에 비해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다.
부모와 떨어져 자라서인지 은주 또한 자라는 내내 자기 앞가림을 단단히 하는 동시에 가족에게도 거리를 두는 등 흔한 어른들 말로 ‘독하고 영악스러운’ 모습이 없지 않았고. 그래서 ‘보고 또 보고’는 자매가 한 집안으로 시집가는 분투기인 동시에 가족 간의 화해를 그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드라마의 마지막은, 출산을 앞둔 은주가 어머니와 마음을 나누다 갑자기 금주의 출산 소식이 들리면서 어머니가 쌩하니 사라지고 홀로 아이를 낳는 모습이었으니 그것이 진정한 화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개인적으로 ‘보고 또 보고’는 ‘재능과 노력이 있어도 팔자 좋은 놈 못 이긴다’는 팔자(八字)우선주의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매사에 철저한 완벽주의자 은주는 기를 쓰고 사력을 다해야 얻어내는 것들을, 사랑 받고 자란 금주는 수월하게 얻어내곤 한다. 결혼 허락도 은주에 비해 금주는 수월하게 받은 편이고, 목표이던 소설가 등단(登壇)과 임신도 큰 힘들이지 않고 이뤄낸다. 재능 있는 놈이 노력하는 놈 못 이기고, 노력하는 놈이 운 좋은 못 이긴다는 옛말이 딱 금주-은주 자매의 이야기 같다. 그래서 점점 나이 들며 한량처럼 살고 싶은 나는 어쩐지 팔자 좋은 금주에게 눈길이 가게 되네?
요즘처럼 집 밖으로 외출하기 두려운 ‘집콕’의 시절에 ‘보고 또 보고’는 훌륭한 안줏거리 드라마다. 20년 전 사회 관습은 어땠는지 새삼 곱씹어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은주나 금주 혹은 은주 어머니나 기정 어머니의 마음에 감정이입해 보다 보면 이렇게 흡인력 강한 드라마가 또 없다니까. 최고 시청률 57.3%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유튜브로 시청한다면 클릭할 수밖에 없는 재치 넘치는 썸네일과 ‘금주파’ 대 ‘은주파’로 나뉘어 옥신각신하는 네티즌들의 현재진행형 댓글이 흥미진진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까 얼른 ‘보고 또 보고’를 보라고.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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