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얼마 전 ‘슈가맨3’에 ‘왕년에 잘나갔던 오빠’로 ‘90년대 꽃미남’의 대표주자였던 김원준이 나왔다. 새삼 추억에 젖으면서 자연스레 왕년에 내가 좋아했던 90년대 대중문화 인물들을 한 명, 한 명 꼽아보게 됐다. 90년대가 워낙 문화 중흥기라 수많은 스타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래도 90년대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존재감 강한 스타는 몇 명으로 좁혀진다. 그리고 호오(好惡)와 취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90년대의 스타로 최진실이 있다.
1988년 데뷔한 이래 최진실은 드라마와 영화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트렌디 드라마의 시초로 불리는 ‘질투’부터 ‘아스팔트 사나이’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장밋빛 인생’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까지 트렌디 드라마와 홈 드라마를 섭렵했다. 드라마로 성공한 스타가 영화계 성적은 죽을 쑤는 사례도 많은데 최진실은 예외였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미스터 맘마’ ‘마누라 죽이기’ ‘고스트 맘마’ ‘편지’ 등의 영화가 흥행한 건 상대 배우와 최진실의 힘이 꽤나 컸다.
갑작스레 최진실을 이야기하는 건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그의 작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장미와 콩나물’과 ‘장밋빛 인생’, 두 편이나 말이지. 1999년 방영한 ‘장미와 콩나물’은 ‘장밋빛 젊음이 결혼 후 콩나물처럼 변해가는 여자들의 인생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로, 무려 안판석 PD와 정성주 작가가 합을 맞춘 가족 드라마.
‘장미와 콩나물’은 여러모로 최진실이 1997년 출연한 ‘그대 그리고 나’와 비교해볼 만하다. 최진실이 식구 많은 집안 아들과 결혼하는 새댁으로 등장한다는 점, 형제 많은 가족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소동이 빈번하다는 점 등 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건 비슷한데, 최진실의 매력만으로 보자면 ‘장미와 콩나물’이 한 수 위다. 시어머니 필녀로 등장하는 김혜자와 최진실의 ‘케미’가 그야말로 오지거든.
김혜자만큼은 아니지만 동서로 출연한 전혜진, 임채원, 김규리와의 ‘티키타카’도 재미났고, 첫째 전광렬-전혜진, 둘째 손창민-최진실, 셋째 차승원-김규리, 넷째 한재석-임채원 커플이 선보이는 부부 스타일도 볼만했다.
‘장미와 콩나물’이 최진실의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작품이라면, 2005년 방영한 ‘장밋빛 인생’은 불행한 결혼생활과 이혼으로 나락에 빠져 있던 최진실을 재기하게 만든 작품.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남편의 외도로 괴로워하다 위암 말기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맹순이’가 최진실이 맡은 역이었다. CF에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를 외쳤던 그가, 귀여운 외모와 똑부러지는 행동으로 만인의 연인이자 요정으로 군림했던 그가, 촌스럽기 그지없는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의류수거함에서 입을 만한 옷을 챙기는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파격 변신한 거다.
21세기임에도 여배우는 결혼과 함께 작품 활동에 어느 정도 제약이 걸리고, 특히 최진실처럼 이혼 등 구설수를 겪는 경우에는 내리막길을 걷거나 조용히 사라진다. 90년대를 평정했던 최진실도 그렇게 사라질 뻔했지만 ‘장밋빛 인생’을 통해 남편의 트렁크 팬티를 입고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은 채 시장바닥에서 가격 흥정을 하는 소위 ‘망가지는’ 모습으로 기사회생했다. 바람이 나 10주년 결혼기념일에 이혼을 요구하는 뻔뻔스러운 남편 반성문(손현주)에게 폭행을 당해 쓰러지는 맹순이의 모습에는 불행했던 개인사가 겹쳤지만 최진실은 피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개인사가 있었기에 더욱 진정성 있는 연기가 가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장밋빛 인생’ 방영 당시 내 마음은 다소 복잡했다. ‘내가 알던 ‘질투’의 최진실이, ‘별은 내 가슴에’의 최진실이, ‘장미와 콩나물’의 최진실이 아줌마 맹순이가 되었다니’ 하는 한탄이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그녀가 다시 사랑받아 안도하는 심정? 뻔뻔한 사람들이 다수 출몰하여 불쌍한 아내를 핍박하여 시청자로 하여금 억하심정을 품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문영남 작가는 ‘장밋빛 인생’에서도 그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하는데, 그 끝을 모르는 구구절절한 신파 속에서 열연하는 최진실이 대단하고 안쓰럽고 또 착잡한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
돌이켜보면 최진실은 20년 연기 인생에서 유독 ‘장미’와 묘한 인연이 있다. 1988년 ‘조선왕조 5백년-한중록’에서 기생 장미 역을 맡아 드라마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장미와 콩나물’로 빼어난 연기 앙상블을 선보이고는, ‘장미의 전쟁’을 거쳐 ‘장밋빛 인생’으로 화려하게 재기했으니까. 비록 ‘장밋빛 인생’과 ‘줌마렐라’ 열풍을 일으킨 유작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덕분에 90년생인 내 막냇동생은 “최진실? 아, 그 아줌마 배우?”라고 말할 만큼 어린 친구들에겐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지만.
장밋빛 인생을 누리지 못한 맹순이와 달리 최진실은 제2의 장밋빛 인생을 누리며 살 줄 알았다. 슬프게도 인생은 한 치 앞을 모르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그래도 그가 남긴 작품과 그 속에서 펼친 연기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20대 때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봤던 ‘장밋빛 인생’을 보며 지금은 그냥 온전하게 그의 연기에 따라 울고 웃는다.
‘장밋빛 인생’을 보다 너무 격한 감정의 파고로 힘들다 싶으면 ‘장미와 콩나물’을 보시라. 드라마는 결혼 후 장밋빛 젊음에서 콩나물처럼 변해가는 여자들을 그렸다지만, 삼시세끼 반찬으로 매일 나와도 질리지 않는 콩나물처럼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최진실이 그곳에 있으니까.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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