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대 국회가 저물고 있다. 20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사상 최초로 2만 건을 돌파했다. 하지만 법안 처리율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30%에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법안만 1만 5000여 건에 달한다. 2개월 후면 20대 국회의원들과 함께 그들이 발의한 계류 법안들도 모두 소멸된다. 비즈한국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경제 관련 현안이 담긴 법안을 골라 입법 배경과 의미를 짚어본다.
기업이 저지른 범죄는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에게 광범위한 피해를 입힌다. 하지만 기업은 집단이자 법인이기 때문에 개인이 저지른 범죄에 비해 제한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 등 다른 서구 국가에 비해 기업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처벌이 경미하다 보니 이익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마다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하다. ‘기업 처벌 3법’이 발의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법안이 공동으로 발의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당 법안들은 기업 또는 기업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자가 범죄 행위를 저질렀을 때 엄벌을 가하자는 취지로 발의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피해액 최대 10배까지 보상해야 실효성 담보…‘징벌적 배상에 대한 법률안’
민사재판에서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제도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1년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이 처음으로 도입되면서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마련됐다.
해당 법률이 시행된 지 9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업들의 반사회적 행위는 이어지고 있다. 20대 국회에서 ‘한국형 레몬법’, ‘BMW 방지법’이라 불리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안들이 국회 문턱을 넘으며 징벌적 배상제도가 다소 보완됐지만, 이는 자동차에 한정돼 적용된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징벌적 배상에 관한 법률안’은 아직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법안은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근본적인 원인이 실효성에 있다고 보고 위법하고 불공정한 행위를 예방하자는 게 골자다.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18년 9월 대표로 발의했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가해자의 징벌적 배상액을 손해 배상액의 3~10배 이내로 규정한다. 가해자로부터 증거 확보를 용이하게 하고 피해자의 소송비용 증가를 막는 조항도 포함돼 있다. 더불어 국민참여 재판을 도입해 징벌적 손해배상책임을 청구하는 사건을 다뤄야 한다는 조항도 담겼다.
그러나 이 법안은 안건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표창원 의원실 관계자는 “이미 비슷한 내용을 지닌 징벌적 배상에 관한 법률안이 여러 건 있었다. 여기다 법사위 내에서도 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법안들이 산적해 상정에 이르진 못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대 국회 내에 해당 법안이 상정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표창원 의원은 2019년 10월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까닭이다. 표 의원은 현재 ‘해인이법’으로 불리는 ‘어린이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 등 국회 본회의 통과가 시급한 법안에 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상장사 대주주가 저지른 배임·횡령은 최대 무기징역까지…‘특정범죄법 개정안’
증권회사에 등록된 회사라면 모두 안전한 회사일까. 회생 가능성이 없음에도 정부 또는 채권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목숨을 연명하는 기업을 ‘좀비 기업’이 늘고 있다. 2018년 반기 보고서 기준 코스닥 상장 기업 중 27.7%인 525곳이 영업이익 전액을 그대로 금융비용으로 지출할 만큼 재정 상황이 좋지 못했다.
기업 경영 사정이 악화하는 데는 경제 여건 등 여러 가지 외적 요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상장기업을 이용해 시세 차익을 얻거나 사내 유보금을 활용하려는 불건전 세력들이 시장을 교란하고, 내부 경영진들의 불투명한 경영 탓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한때 국내 피자 프랜차이즈 1, 2위를 다퉜던 ‘미스터피자’ 운영사 MP그룹이 정우현 회장 배임·횡령 혐의로 현재 상장 폐지까지 논의되는 게 일례다.
이러한 이유로 발의된 법안이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다. 2018년 11월 이태규 바른미래당 의원이 대표로 발의했다. 형법에 존재하는 업무상 횡령·배임을 저지른 자를 상장회사 대주주로 범위를 좁혀 가중처벌하자는 게 해당 법안의 취지다.
형법 제356조에 따르면 횡령·배임죄를 범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해당 법안에서는 죄를 저지른 대상이 상장회사 대주주일 경우 배임·횡령 금액에 따라 최대 무기징역까지 처벌하는 조항이 담겼다.
앞서 예로 들었던 정우현 회장은 2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만약 해당 법안이 통과될 경우, 정우현 회장의 배임·횡령액이 수십억 원대에 달하기 때문에 형벌은 5년 이상으로 형이 늘어난다.
하지만 이 법안은 2019년 3월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상정됐을 뿐,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있다. 법무부와 법원 행정처 모두 입법 취지에는 공감의 뜻을 전했지만, 비례성의 원칙과 특정 단어에 대한 명확성이 부족해 검토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법무부는 “개정안의 가중처벌 정도가 형벌의 비례성 원칙에 비추어 타당한지 의문이다. 또한 횡령·배임죄의 주체인 ‘대주주’, ‘특수관계인’에 대한 정의 규정이 없어 명확성의 원칙 및 포괄위임금지원칙에 저촉될 소지가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태규 의원실 관계자는 “개정안에 적힌 내용 그대로 가면 좋겠지만, 입법 취지대로 ‘불공정 거래를 일삼는 상장회사를 일벌백계하자’라는 의미만 살릴 수 있다면 회의를 통해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법안이 소위에서 통과되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의사결정자와 함께 ‘기업’도 처벌하자…‘기업 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
미국은 경제 범죄를 저지른 자에게 자비가 없다. 사안에 따라서는 1급 살인 범죄자에 버금가는 형을 경제 범죄자에게 내리기도 한다. 2012년 미 법원은 70억 달러(약 8조 3000억 원) 규모의 금융 다단계 사건을 저지른 자에게 징역 110년을 선고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독 경제 범죄와 관련해서는 처벌 수위가 약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박재호 의원은 2018년 12월 ‘기업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로 발의했다.
기업 범죄처벌법은 박재호 의원의 공약 중 하나였다. 박재호 의원은 “다단계 사기 등 기업 범죄로 한 서민들의 피해가 늘고 있다. 하지만 처벌을 받는 건 일부 관련 책임자일 뿐이다. 기업의 위법행위가 반복되는 이유”라며 “이에 기업 범죄의 경우 기업을 직접 벌금, 몰수·추징, 손해배상 등 법적 책임의 대상으로 지정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피해자를 강하게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기업 의사결정자가 기업 범죄를 저지를 경우 해당 기업은 연 매출 100분의 10의 범위 내에서 벌금을 내야 한다. 또한 기업이 범죄로 취득한 이익은 몰수되며 피해자가 입은 손해도 배상한다. 이때 기업에 징벌적 배상책임을 물어 처벌 수위를 높인다. 이와 함께 기업 범죄를 저지른 기업에 5년 범위 내로 국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이 진행하는 사업 입찰 참여를 제한하는 조항을 뒀다.
그러나 문제는 해당 법안이 국회 법사위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발의 3개월 후인 2019년 3월 해당 법안이 상정됐지만 이후 1년여 동안 소위원회에도 오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타법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해당 법안을 검토한 전문위원은 “법사위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기업이 국민의 생활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력을 고려하면 입법 취지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제정안이 규정하는 벌금형이 과도해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될 우려가 있다. 벌금형 부과 외에도 징벌적 손해배상, 공공사업 입찰 제한 등의 조치를 동시에 부과하는 것은 기업에 지나치게 가혹한 책임을 부과하는 측면이 있다. 제정안의 전면적 수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박재호 의원실 관계자는 “의사 결정자만 처벌한다면, 그 자리는 타 직원이 채우면 그만이다. 기업 범죄가 지속되는 이유다. 법인도 하나의 인격으로 봐야 한다. 법인격을 지닌 기업이 처벌을 받아야 ‘낙인 효과’로 인해 다시는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없을 것”이라며 “해당 법안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회의조차 진행되지 않아 유감스럽다.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열릴 임시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찬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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