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빰빰빠바밤~ 빰빰빠바밤~!” 꼭 13년 전인 2007년 1월 초, 우리는 지금까지도 긴박한 순간 BGM으로 자주 삽입되는 ‘B Rossette’와 함께 수술실에 들어선 남자를 만난다. 권위의식이 가득한 차가운 표정의 그 남자는 명인대 외과의사 장준혁(김명민).
‘의학드라마=흥행불패’라는 공식이 있을 만큼 의학드라마를 사랑하는 대한민국이지만 그 중에서도 ‘하얀 거탑’ 장준혁 캐릭터의 존재감은 지금까지도 단단하다. 그에 필적할 캐릭터는 ‘골든 타임’의 최인혁(이성민)이나 최근 시즌2를 시작한 ‘낭만닥터 김사부’의 김사부(한석규) 정도?
‘하얀 거탑’은 그간 존재한 의학드라마의 이미지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의학드라마는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현장이기에 특유의 긴박감은 물론 온갖 희로애락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장르다. 그렇지만 대개 한국의 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인 경우가 많았다. 의사와 의사가, 의사와 간호사가, 의사와 환자가 사랑에 빠지는 뭐 그런 이야기들.
의료 행위를 보다 리얼하게 그리더라도 어쨌든 러브스토리가 빠지지 않았고, 거기에 의료인의 투철한 사명감을 양념처럼 얹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나타난 ‘하얀 거탑’은 특이하게도 ‘병원에서 정치하는 드라마’였다. 실력은 최고인데 오만하기 짝이 없는 장준혁이 명인대 외과 과장이 되어 보다 높은 곳으로 나아가고자 폭주하는 드라마였다고.
정년퇴임을 앞둔 외과 과장 이주완(이정길)이 장준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모교 출신인 노민국(차인표)을 데려오려는 데부터 문제가 생긴다.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 여기던 외과 과장 자리가 날아갈 처지에 놓이자 장준혁은 장인인 민충식(정한용)의 돈과 의대 동문회장 유필상(이희도)의 인맥, 명인대 진료부원장 우용길(김창완)의 권력 등을 등에 업고 전방위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후배 의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필요에 따라서는 상대 후보인 노민국에게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뇌물로 사람을 매수하고 협박도 서슴지 않는 건 물론이다.
국립대학 의대 외과 과장이란 자리가 장준혁이란 천재 의사를 그토록 폭주하게 할 만큼 대단한 자리인가는 의문이다. 내가 접한 현실의 국내 빅3 대형병원 외과, 내과 과장들은 장준혁만큼 포스가 넘치기는커녕 일상에 찌든 공무원처럼 관료적이었거든(십수 명의 의사를 거느리고 카리스마 쩔게 회진 도는 드라마 속 풍경도 현실과는 차이가 있다).
아마 원작이 1960년대 연재된 일본 소설인 만큼 국내 의학계 현실과는 다른 것 같다. 게다가 장준혁이란 한 사람을 외과 과장으로 만들기 위해 뭉치는 사람들 또한 여타 드라마처럼 우정이나 의리 같은 선한 의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제각각 사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인 그들은 철저히 이해타산을 따지며 실리적으로 움직인다. 그렇기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사례는 부지기수.
특히 흥미로웠던 인물은 진료부원장 우용길이다. ‘하얀 거탑’은 우용길을 필두로 유필상, 민충식 등 기득권 세력들이 사안마다 모종의 관계를 맺고 향연을 갖는 장면이 다수 등장하는데, 이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가는 그 모습들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그 사이에서는 도리어 최고의 의사를 꿈꾸는 장준혁이 순진해 보일 정도다.
병원 내 정치싸움에서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은 듯한 우용길은 장준혁이란 말(馬)이 자신의 뜻에 맞춰 움직이는지 아닌지에 따라 가차 없이 상대를 옭아매는데, 그 옭아맴 역시 누구도 모르게 단숨에 해치운다. “누가 봐도 좋은 기회라는 건 말입니다. 말 그대로 누가 봤기 때문에 절대 좋은 기회가 아닙니다”라는 명대사를 남기면서.
우용길의 친구이자 파트너인 유필상이 남긴 명대사도 인상깊다. 장준혁의 편에 서서도 미적지근하게 구는 우용길에게 “친구야, 이왕 도와줄 거면 빤스 벗고 시원하게 도와줘라”라고 일갈하는 대사는, 혈연·지연·학연으로 단단하게 뭉친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돈으로 명예와 권력을 사려 드는 민충식의 대사는 또 어떻고. “자판기도 동전을 넣으면 커피 한잔은 토해냅니다”라는 말은, 돈이 전부라고 믿고 싶진 않지만 돈의 위력을 아는 현대인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하얀 거탑’은 전반에 외과 과장이 되기 위한 장준혁의 폭주를 다루더니, 중반부부터는 장준혁의 오진과 무관심으로 죽음에 이른 환자 유가족과의 재판에 중점을 둔다. 환자의 가슴 사진을 보면 폐 음영이 있으니 폐 생검을 진행했으면 좋겠다는 친구이자 소화기내과 부교수 최도영(이선균)의 조언을 “이건 딱 봐도 폐결핵의 옛 병소야”라고 잘라 말하며 묵살한 건 자신이 최고의 의사라고 자신하는 장준혁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폐 음영이 폐결핵의 옛 병소가 아니라 폐 전이였음을 알고 나서도 그는 끝끝내 “내 수술은 완벽했습니다”라며 자신의 잘못을 부정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오만하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는 장준혁을 사랑했다. 이른바 개천에서 난 용이었던 그가 태생부터 용이요, 금수저인 사람들을 이기고 승승장구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랬기에 그토록 원하던 자리를 차지한지 얼마되지 않아 재판에 휘말리더니(인과응보지만) 막판에는 담관암에 걸려 불꽃처럼 스러지는 모습을 보며 더 안타까워했더랬다.
악역에 가까운 장준혁에게 응원을 보낸 건 그가 속한 병원 세계가 보통 사람들이 속해 있는 조직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겁한 수를 써서라도 최고가 되고 싶고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성공하고 싶다는 그 얄팍하지만 강렬한 욕망을 가진 그가 짠했다. 세상을 다 가질 것처럼 욕망을 향해 폭주하지만 결국 조직사회의 가련한 말(馬)에 불과한 장준혁이 안쓰러웠다.
예전에 의학드라마 ‘해바라기’를 소개하면서, ‘내가 환자라면, 그리고 환자의 보호자라면, ‘하얀 거탑’의 거만한 천재 외과의사 장준혁(김명민)보다 환자 한 명 한 명에 집중하는 ‘해바라기’의 의료진의 손을 붙들 것 같으니까’라고 쓴 바 있다.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다. 현실에서 나의 주치의로, 내 가족의 주치의로 장준혁 같은 의사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준혁 같은 캐릭터를 만나면 또 다시 애정을 보낼 것 같다. ‘개천 용’이 사멸되다시피 한 이 사회에서 용은커녕 이무기도 되지 못한 나는 어쩐지 그럴 것만 같다. 그게 장준혁이란 캐릭터의 존재감이 여전히 이 사회에서 단단한 이유가 아닐까.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올드라마]
내 인생의 치트키 '얼렁뚱땅 흥신소'
· [올드라마]
단언컨대, '용의 눈물'을 뛰어넘는 사극은 없다
·
우울할 때 보면 딱 좋은 로맨틱 코미디 '낭랑 18세'
· [올드라마]
대게가 그리워질 때면 생각나는 '그대 그리고 나'
·
82년생 김지영 엄마의 삶은 어땠을까? '아들과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