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인생에 있어 ‘치트키(게임을 유리하게 하려고 만든 문장이나 프로그램)’가 간절한 순간이 있다. 게임에서 난관에 봉착하거나 상황이 지지부진할 때 치트키를 쓰면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처럼, 살아가면서도 그런 순간마다 치트키를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게임 치트키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위기와 고난의 순간을 견뎌내기 위한 자구책을 가지고 있다. 내게 드라마 ‘얼렁뚱땅 흥신소’도 그런 자구책, 치트키의 일종이다. 홀로 떠난 모로코의 험악한 숙소에서 뜬눈으로 밤을 샐 때, 뇌는 꽉 막혀 있고 무엇이라도 싸질러야 하는 고통스러운 마감의 나날에, ‘인생 왜 이렇게 살지’ 하는 ‘현타’가 오거나 끝없는 슬픔으로 막막한 순간에 나는 ‘얼렁뚱땅 흥신소’를 다시 보면서 위안을 얻곤 한다.
‘얼렁뚱땅 흥신소’는 간결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드라마다. 영화나 드라마를 요약하는 데 젬병인 나 같은 사람은 중언부언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아 몰라, 그냥 한 번 봐!”라고 끝맺을 만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보면 ‘우연히 흥신소 직원으로 오해를 받아 보물찾기에 나서는 네 청춘의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라고 소개된다. 일목요연한 설명이긴 한데, ‘얼렁뚱땅 흥신소’의 매력을 드러내기엔 턱없이 모자라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서울 한복판에서 황금을 찾아 나서는 어딘가 결핍된 어른들의 좌충우돌 스펙터클 성장서사이자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짜르르하게 만들면서도 볼 때는 어이없지만 돌아서서 곱씹을수록 픽픽 웃게 만드는 소소한 행복의 보고인데, 심지어 평균 시청률 3%라는 처참한 시청률을 기록해 ‘아는 사람만 아는’ 마니아 드라마가 되어 팬들에게 오묘한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랄까(헉헉).
덕수궁 근처 낡은 황금빌딩에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박무열(이민기), 만화가게를 운영하는 김용수(류승수), 삼류극단 배우이자 영매사로 활동하는 정희경(예지원)이 산다. 어느 날, 무열과 용수는 빌딩 내 망해버린 흥신소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먹다 애완고양이를 찾아 달라 의뢰한 사모님에 의해 얼렁뚱땅 흥신소 직원처럼 고양이를 찾아다니게 되고, 그 와중 빌딩 지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의뢰를 받은 희경과 함께 우연히 지하 벽 속에서 백골이 된 시체와 함께 나뭇잎 모양 황금 세 덩이를 발견한다. 이 뉴스가 일약 화제가 되면서 뉴스에 비친 황금빌딩을 보고 폐쇄공포증을 갖게 된 재벌 상속녀 유은재(이은성)가 세 사람을 찾아오고, 오래전부터 황금빌딩과 인연이 있던 백민철(박희순) 패거리도 이들을 주시하게 된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숨겨둔 열두 항아리의 황금을 찾는다지만 ‘얼렁뚱땅 흥신소’의 누구도 절박하게 황금을 탐하지는 않는다. 무열은 황금도 황금이지만 은재에게 빠져 함께하는 경향이 크고, 무욕의 삶을 사는 용수도 실종된 동생의 유괴범을 찾으려 벽 속 시체의 신원을 알고 싶다고 한 은재의 거짓말에 흥미를 느껴 합류한 경우다.
이유 없이 생긴 폐쇄공포증을 치료하고 황금빌딩에 얽힌 아빠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은재가 그나마 절실한 편이지만 황금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그도 그럴 것이 엄청난 부자니까), 1989년부터 황금을 찾았던 조폭 두목 백민철 또한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고물장수 이산(윤문식)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참여한 측면이 강해 보인다. 그나마 가장 순수하게 황금을 욕망하는 건 생활고에 시달리기에 사치스럽게 살고 싶다는 희경 정도?
절박하게 황금을 탐하지는 않지만 황금을 찾아 나서는 이들의 여정은 희한하게도 곪을 대로 곪은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어린 시절 아빠를 잃고 상속받은 거대한 재산 때문에 친척 및 타인과의 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아 남을 믿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 혼자였던 은재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을 배운다.
고등학생 시절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갔다가 실종된 형을 둔 용수는 죄책감과 분노, 우울 등의 감정을 한없이 안으로만 쌓으면서 적극적인 삶을 외면해오다 감정을 분출하는 계기를 맞는다. 심지어 악당 포지션에 속하는 백민철도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평생 짊어져야 했던 상처를 희경에게 들려주고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황금보다도 귀한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보는 사람들(시청자) 또한 따스한 위로를 받는다. ‘얼렁뚱땅 흥신소’를 여러 번 봤지만 항상 나는 같은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뭉클한 감정에 젖곤 한다. 무열과 용수, 희경이 은재의 집에서 추석을 맞으며 송편을 빚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그들 속에 있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가족끼리 소풍 가서 낮잠 자다 깨어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하는 용수의 말을 들으며 짠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위로의 백미를 꼽자면 14회 번외편을 얘기 안 할 수 없다. 조수미의 ‘챔피언’이 흘러나오며 꽤 비중 있던 조연부터 스쳐 지나가는 단역에 이르기까지 ‘얼렁뚱땅 흥신소’에 등장했던 이들의 모습을 깨알같이 비추며 이런 자막이 나온다. ‘그들을 억지로 기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서 이 이야기에 참견하기에는 너무 바쁠 뿐입니다.’ 이토록 사람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장면을 일찍이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동적인 번외편이었다.
두 여자 캐릭터와 두 남자 캐릭터가 메인으로 나서지만 그 누구와도 연인으로 얽히지 않으며(짝사랑 제외) 양념식으로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결코 그것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이 드라마의 특이점. 심지어 메인 캐릭터 넷을 비롯해 등장인물 누구도 혈연으로 엮이지 않는다. 결국 남는 건 가족이라고 부르짖는 대한민국 드라마계에서 혈연과 결혼, 혹은 가능성(연인)마저도 배제한 드라마는 장르물 빼고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여느 가족 못지않은, 아니 여느 가족보다 느슨하되 끈끈한 보통 사람들의 연대를 ‘얼렁뚱땅 흥신소’는 보여준다.
2019년이 지나고 이제 2020년. 어딘지 허전하고 씁쓸하고 그러면서도 실낱 같은 기대가 뭉글뭉글 일어나는 사람들에게, 지나온 과거가 너무 아프고 힘들어 미래를 꿈꾸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얼렁뚱땅 흥신소’를 권한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저마다의 황금을 찾기를.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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