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우주를 무대로 하는 영화와 소설에서 블랙홀은 단골 소재다. 그만큼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로 가득한 천체이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랙홀은 여전히 그 존재부터 확인하기 쉽지 않는 까다로운 존재, 암흑 그 자체다.
그런데 최근 천문학자들이 ‘은둔 고수’ 블랙홀의 흔적을 추적할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바로 그 블랙홀 사냥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주인공이 애초에 블랙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작되었던 생뚱맞은 망원경이라는 점이다.
#그 많은 블랙홀은 왜 안 보일까
태양에 비해 질량이 20배 이상 더 무거운 육중한 별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폭발적인 진화를 겪는다. 수천만 년 이내의 짧은 생을 속도감 있게 살고 나면, 이런 무거운 별들은 아주 장엄한 초신성 폭발과 함께 화려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폭발 잔해 중심에는 평생 모아놓았던 무거운 핵융합 찌꺼기들이 아주 밀도 높게 뭉쳐 남는다. 이렇게 남은 땅땅하게 뭉쳐진 찌꺼기 덩어리가 바로 블랙홀 또는 중성자별이다.
태양에 비해 20배 이상 더 질량이 무거운 별들은 우리 은하에만도 수없이 널려 있다. 모든 육중한 별이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을 남기는 이런 진화 과정을 겪는다면, 우리 은하 안에서만 수억 개가 넘는 아주 많은 항성 질량 블랙홀을 발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은하 안에서 실제로 그 존재가 관측된 항성 질량 블랙홀은 20개 남짓이다.
분명 지금까지 수억 개가 넘는 아주 많은 육중한 별들이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면서 아주 많은 블랙홀들이 만들어졌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무거운 별의 진화 과정이 실제 우주에서 잘 진행되고 있다면, 우리 은하는 분명 이런 항성 질량 블랙홀들로 가득한 세계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 관측되는 블랙홀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다. 대체 그 많은 블랙홀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1]
#블랙홀을 보려면 파트너 별이 필요하다
블랙홀은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아주 강한 질량으로 주변 시공간을 너무나 깊게 파놓았기 때문에, 블랙홀의 어마어마한 중력을 벗어나려면 빛의 속도를 초월해야 한다. 즉 우주에서 가장 빠른 빛의 속도로 내달려도 블랙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블랙홀은 빛조차 새어나오지 못하는 극한의 어둠의 구멍이란 뜻에서 이 매력적인 별명을 붙였다.
따라서 블랙홀은 다른 일반적인 별처럼 직접 빛을 방출하지 않기 때문에, 블랙홀에서 나오는 빛을 직접 망원경으로 확인해서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다. 애초에 블랙홀 자체는 빛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 블랙홀 곁에 함께 중력으로 엮인 채 그 곁을 지키고 있는 파트너 별, 동반성이 자리하고 있다면 블랙홀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지구에서 약 2억 9000만 광년 거리의 은하 PGC 043234 중심에 있는 초거대질량 블랙홀 주변에 있던 별이 으스러지고 파괴되면서 막대한 먹방이 펼쳐지는 순간 강력한 엑스선 신호가 관측되었다. 당시 관측된 엑스선은 블랙홀 주변에 형성된 고온의 강착 원반에서 나온 것이다. 영상=NASA's Goddard Space Flight Center/CI Lab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 곁에 있는 동반성 외곽 층의 가스 물질이 빠른 속도로 유입되어 들어간다. 마치 해리 포터 시리즈의 디멘터가 사람들의 행복한 기억을 빨아먹듯이 블랙홀은 옆에 놓인 별의 물질을 빨아들이며 질량을 불려나간다. 블랙홀은 자신이 집어삼키는 동반성의 물질들로 자기 주변에 거한 상을 차려놓는다. 이렇게 블랙홀을 향해 빨려 들어가며 빠른 속도로 가속되어 맴도는 물질들의 원반을 강착 원반(accretion disk)라고 한다.
강착 원반은 아주 높은 온도로 가열된다. 그래서 에너지가 아주 높은 엑스선이나 감마선과 같은 짧은 파장의 빛을 방출할 수 있다. 또 블랙홀 중심의 자전축을 따라 형성된 강력한 자기장에 의해 블랙홀 주변에 빨려 들어가던 물질들이 빠른 속도로 방출되어 나가는 제트 현상이 벌어진다. 강한 자기장을 따라 높은 속도로 가속되어 물질들이 분출되어 나오면 싱크로트론 복사(synchrotron radiation)이 벌어지며 강한 엑스선 등의 빛이 방출될 수 있다.
물론 강착 원반이나 블랙홀의 제트는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 빛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인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을 훨씬 넘는 더 먼 영역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강착 원반이나 블랙홀 제트에서 만들어지는 엑스선이나 감마선 빛은 충분히 블랙홀을 떠나 먼 지구에서도 관측될 수 있다. 지금까지 천문학자들은 옆에 동반성을 끼고 그 별을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는 블랙홀들의 모습을 관측해온 것이다.
#외톨이 블랙홀은 볼 수 없다
이렇게 먹방 중인 블랙홀과 그 블랙홀에게 먹방 재료가 될 상차림을 제공해주는 동반성으로 이루어진 쌍성이 강한 엑스선을 방출하는 모습을 엑스선 쌍성(X-ray binary)이라고 한다. 보통 블랙홀은 충분히 많은 양의 식사를 제공할 동반성이 곁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엑스선 쌍성은 블랙홀과 그 곁의 덩치 큰 거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혼자서는 절대 존재를 티내지 않는 블랙홀의 흔적을 알려주는 ‘환상의 커플’이다.
하지만 우주에 있는 블랙홀 모두가 충분한 식사를 제공할 덩치 큰 든든한 동반성을 곁에 두고 있지는 않다. 만약 혼자 덩그러니 있는 외톨이 블랙홀이거나, 동반성의 질량이 너무 작거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충분히 먹방을 찍을 수 없는 블랙홀들은 엑스선 쌍성이 될 수 없다. 이런 배고픈 외톨이 블랙홀은 자신의 존재를 티낼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없다.
지금까지 우리 은하 안에서 발견된 모든 항성 질량 블랙홀들은 다 엑스선 쌍성이다. 2015년 이후로 LIGO와 같은 중력파 검출기를 통해 확인된 무거운 블랙홀들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톨이 블랙홀을 직접 발견한 적이 없다. 애초에 이런 블랙홀들은 흔적 자체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엑스선을 내지 않아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천문학자들은 강한 엑스선을 방출하는 엑스선 쌍성이 아닌 경우에도 블랙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동반성이 있지만 블랙홀과 사이가 너무 멀어서, 블랙홀이 강한 엑스선을 낼 만큼 폭발적인 폭풍 먹방을 찍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방법은 활용할 수 있다. 대략 블랙홀과 동반성의 거리가 태양과 수성 사이와 비슷한 0.3AU 이상을 두고 떨어진 경우다.
지구에서는 주기적으로 블랙홀이 동반성 앞으로 나타나 동반성의 일부를 가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로 이때 재밌는 현상이 벌어진다. 블랙홀은 그 중력이 워낙 강력해서 주변의 시공간을 아주 심하게 왜곡하고 휘어 놓는다. 그래서 블랙홀이 동반성 앞을 지나가면, 블랙홀의 실루엣 뒤로 가려진 만큼 동반성의 별빛이 안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블랙홀 너머에 가려진 동반성의 빛들이 더 밝게 증폭되는 효과가 벌어진다.
말 그대로 블랙홀 주변에 왜곡된 시공간으로 인해, 블랙홀의 강한 중력이 빛의 경로를 꺾어 더 밝게 모아주는 볼록렌즈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중력 렌즈 현상의 일종인 이러한 셀프-렌징(Self-lensing) 효과 때문에 블랙홀이 멀리 떨어진 동반성 앞을 가리고 지나갈 때마다 오히려 전체 밝기가 더 밝게 보이는 효과가 발생한다.[2]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 곁의 동반성은 둥근 구형을 온전하게 유지하지 못하고 약간 찌그러진 타원체의 모습을 하게 된다. 이 경우 타원체로 찌그러진 별이 자전하면서 지구에서 관측하는 밝기가 달라질 수 있다. 영상=Mark A. Garlick
또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 동반성의 물질이 빠르게 빨려 들어가진 않더라도 동반성의 형태가 약간 길게 늘어난 타원체의 모양으로 찌그러질 수 있다. 완벽한 둥근 농구공 모양이 아니라 길게 늘어난 럭비공 형태로 동반성의 모양이 일그러지면, 그 동반성이 자전하면서 우리 지구에서 보이는 별의 사이즈와 밝기가 규칙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타원체 변광(EV, Ellipsoidal variation)은 동반성의 형태가 찌그러진 모양이며, 그 곁에 분명 동반성의 모양을 찌그러뜨린 블랙홀과 같은 강한 방해꾼이 숨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셀프-렌징이나 타원체 변광에 의한 독특한 규칙적인 밝기 변화 패턴이 어떤 별에서 발견된다면, 그 별은 멀찍이 블랙홀을 둔 동반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블랙홀 사냥꾼으로 변신하는 외계행성 사냥꾼
천문학자들은 외계행성을 찾기 위해 2018년 우주로 올라간 TESS 우주 망원경이 바로 이 블랙홀 사냥에 최고의 적임자임을 알게 되었다. TESS는 3000개가 넘는 외계행성을 발견해 외계행성 분야의 신기원을 이루어냈던 케플러 우주 망원경의 뒤를 잇는 후발주자다.
케플러와 TESS 우주 망원경 모두 멀리 떨어진 별 곁을 맴도는 외계행성이 주기적으로 별 앞을 가리고 지나갈 때마다 살짝 가려지는 별빛의 밝기 변화를 통해 외계행성의 존재를 확인한다. 별의 밝기가 규칙적으로 조금씩 아주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원래 밝기로 돌아왔다가 다시 또 살짝 어두워지는 이런 규칙적인 밝기 감소 현상을 통해 외계행성을 발견한다.
케플러와 TESS 우주 망원경은 별 주변을 맴도는 외계행성에 의해 별빛이 살짝 가려지면서 어두워지는 식 현상(Transit)을 활용한다. 영상=NASA's Goddard Space Flight CenterESA/Hubble
그런데 만약 그 별 곁을 도는 존재가 외계행성이 아니라 중력이 아주 강한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라면? 그 별 앞을 가리고 지나가는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의 어마어마한 셀프-렌징 현상에 의해 블랙홀이나 중성자별 너머에 가려진 별의 빛이 더 증폭돼 밝기가 살짝 더 밝아지는 효과가 나타난다.
외계행성이 별 앞을 가리고 지나갈 때는 밝기가 살짝 어두워지지만,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이 별 앞을 가리고 지나가면 반대로 밝기가 살짝 더 밝아지는 것만 달라질 뿐이다. 외계행성과 마찬가지로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에 의한 셀프-렌징과 타원체 변광 역시 일정한 주기로 규칙적으로 관측되어야 한다.
적색거성 앞으로 백색왜성이 지나가면서 강한 셀프-렌징 현상으로 인해 백색왜성 뒤로 가려진 적색거성의 빛들이 오히려 더 증폭되면서 더 밝아지는 과정을 담은 애니메이션. 이미 천문학자들은 케플러 우주 망원경을 통해 백색왜성에 의한 셀프-렌징 현상을 목격했다. 영상=NASA/JPL-Caltech
실제로 이미 앞서 천문학자들은 케플러 우주 망원경을 통해, 놀랍게도 주기적으로 밝기가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밝아졌다가 다시 원래 밝기로 돌아왔다가 다시 밝아졌다가를 반복하는 별을 발견한 적이 있다. 이 별 KOI-3278의 놀라운 밝기 변화는, 그 별 앞을 주기적으로 밀도 높은 백색왜성이 지나가면서 셀프-렌징 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임을 알아냈다. 따라서 별 앞을 가리고 지나가는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이 새로운 방법은 이미 꽤 검증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3]
#의도치 않게 블랙홀도 찾게 된 TESS
흥미롭게도 케플러나 TESS 우주 망원경은 애초에 기획되고 제작되어 우주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블랙홀 같은 걸 찾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외계행성 사냥뿐 아니라 블랙홀 사냥꾼 역할까지 할 수 있는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TESS는 운 좋게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지구 곁을 13.7일 주기로 맴돌면서 상대적으로 지구와 가까운 범위 안에서 외계행성을 탐색하고 있는 TESS. 이제 곧 블랙홀을 찾아줄 것이다. 영상=NASA's Goddard Space Flight Center
과연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TESS는 여전히 너무나 부족한 항성 질량 블랙홀들의 개수를 채워줄 수 있을까? 멀리서나마 동반성을 둔 경우에만 활용할 수 있다는 한계가 여전히 있지만, 어쨌든 블랙홀을 사냥하는 그물을 더 키울 새로운 방법이 만들어졌다.
TESS는 곧 우주 최고의 은둔 고수 블랙홀들과의 치열한 숨바꼭질 두 번째 라운드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TESS는 가장 정교하게 계획된 외계행성 사냥꾼이자, 어쩌다 데뷔한 블랙홀 사냥꾼으로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1] https://ui.adsabs.harvard.edu/abs/2019arXiv191106865T/abstract
[2]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3847/1538-4357/ab3a4f/pdf
[3] https://science.sciencemag.org/content/344/6181/275.full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galaxy.wb.zi@gmail.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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