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사극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주연진의 연기가 너무 약하다 싶을 때는 과감히 제외한다. 연기력이 부족해도 현대극에서는 ‘인생캐’를 만나 빛을 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사극에서는 빼어난 대본과 화려한 연출이 뒷받침해도 허약한 발성과 어색한 대사 처리를 감춰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퓨전사극도 아닌 정통 대하사극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인지 전설로 꼽히는 대하사극에선 이른바 ‘연기 구멍’이 적다. 그중에서도 ‘용의 눈물’은 ‘연기 끝판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의 눈물’은 임금을 뜻하는 용(龍)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 그 용들을 보필하는 시대의 영웅들을 그리면서 임금의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혹독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정치 서사극.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 시기인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하여 권력을 탐하고 좇다 결국 권력의 허망함까지 맛보게 한다.
태조 이성계(故 김무생)와 태종 이방원(유동근)을 필두로 한 이 대서사시는 100부 예정이었으나 무려 59회가 연장되어 159부작으로 끝났음에도 질질 끈다는 인상 없이 종영에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용의 눈물’이 방영하던 1996년 말~1998년에 ‘시크한’ 고딩이었던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성계의 죽음 앞에 편전을 굴러다니며 오열하던 이방원을 보며 눈시울이 뜨끈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여말선초를 다룬 드라마는 ‘용의 눈물’ 외에도 많았다. 1983년 방영했던 ‘조선왕조 500년-추동궁 마마’부터 ‘대왕 세종’ ‘뿌리깊은 나무’ ‘대풍수’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그리고 최근 종영한 ‘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시기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필연적으로 ‘용의 눈물’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사극은 역사가 스포일러인지라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에 맞는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색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고 김무생의 태조 이성계와 유동근의 태종 이방원은 압도적이었다. 비교적 근작이었던 ‘정도전’에서 유동근이 이성계를 맡아 “내가 있는 여기가 곧 도당이다”라고 선언했을 때도 전율에 떨었지만, 그랬음에도 ‘정도전’의 유동근-안재모의 태조-태종보다 ‘용의 눈물’의 고 김무생-유동근의 태조-태종이 훨씬 짜릿했다.
이성계가 아들 이방원을 비롯한 아들들과 여러 당여(黨與)들의 도움을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조선(朝鮮)이란 나라를 세울 때까지는 그나마 순탄했다.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가 57세의 나이에 왕으로 추대된 건 불과 8회차 때다.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에 의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며 조선의 설계자 역할을 맡은 삼봉 정도전(故 김흥기)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약 3분의 1 지점까지는 왕권 중심의 이방원과 신권 중심의 정도전의 팽팽한 대결 구도가 그려진다.
조선이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시시때때로 토론을 방불케하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일품인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어느 누구의 편도 쉽사리 들기 어려울 만큼 각자의 입장이 팽팽하다. 하기야 정치에 정해진 올바름이 어디 있으랴. 이때 당대의 천재이자 노회한 정객 정도전을 연기한 고 김흥기 배우의 연기는 압권이었는데, 대학 초청 강연에서 정도전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강연할 정도로 인물을 파고든 배우의 노력이 애초 지닌 원숙한 연기력과 맞물려 빛을 발한 경우다.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두 아우 방번, 방석을 죽인 이후 ‘용의 눈물’은 다시 3분의 2 지점까지 2차 왕자의 난과 방원의 왕위 등극, 태조의 위세를 업고 일어난 조사의의 난 등을 겪으며 극한의 갈등을 겪는 부자(父子) 이성계와 이방원의 모습을 그린다. 생때같은 어린 자식 둘을 장성한 다른 자식의 손에 잃은 이성계의 피눈물을 토하는 모습이며 서슬 퍼렇게 방원에게 냅다 벼루를 내던지는 모습, 저 유명한 함흥차사 일화, 태조 자신의 환영식에서 방원에게 활을 쏘고 철퇴를 꺼내 내리치던 이성계의 살해 시도까지, 그야말로 현대의 막장 드라마는 발끝도 못 미칠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장대하게 펼쳐지는 때다.
특히 함흥차사 일화와 아들을 치려던 조사의의 난을 딛고 결국 아들 이방원에게 돌아오던 때 벌인 살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이성계가 “하늘의 뜻이로구나”라고 읊조리고는 방원에게 술을 따르는 장면은 애초 예정돼 있던 100부작 마무리 즈음이라 그런지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라고.
개인적으로 ‘용의 눈물’의 하이라이트는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의 대립과 극적인 화해라고 보지만, 연장된 이후의 이야기들도 사뭇 흥미진진하다. 남편 이방원을 적극 도와 그를 왕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던 여장부 원경왕후(최명길) 집안의 몰락, 아버지가 벌이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에 환멸을 느낀 맏아들 양녕대군(이민우)이 엇나가며 끝내 폐세자가 되는 과정, 권력을 쥐었으나 이내 권력에서 내쳐지는 이방원의 측근들, 조선조 최고의 성군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안재모)의 등극 등등. 고 김무생, 고 김흥기, 유동근, 최명길, 김영란 같은 후덜덜한 배우진에 이민우, 안재모, 정태우, 이재은, 안연홍, 송윤아, 하지원 같은 젊은 배우들의 리즈 시절을 엿보는 호화로움도 ‘용의 눈물’를 보는 즐거움이었다.
정사뿐 아니라 유명한 야사를 적절히 각색한 ‘용의 눈물’의 흡인력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태종 이방원이 병든 몸으로 가뭄을 위한 기우제를 지내며 피를 토하듯 자신의 죄를 고하고 “비를 내려주소서! 비!!”를 외치고 결국 비를 맞는 마지막 장면까지도 명장면이거든.
감히 단언컨대, (내 기준이지만) ‘용의 눈물’을 넘어서는 대하사극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언젠가 ‘용의 눈물’을 넘어서는 사극이 나오면 얼마나 짜릿할까? 혹은 ‘용의 눈물’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면 씁쓸하게 그 옛날의 ‘연기 용’들을 추억하며 술 마시며 주정이나 하려나.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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