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계절 탓인지 상황 탓인지, 요즘 들어 시시때때로 우울하다. 우울함을 달래던 ‘동백꽃 필 무렵’도 끝나버렸다. 그렇다고 슬플 때면 힙합을 즐긴다는 강현겸(만화 ‘언플러그드 보이’)을 따라 할 수도 없고, 국영란(드라마 ‘에덴의 동쪽’)처럼 학춤을 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파고드는 건 오로지 ‘펭수’와 유치하다 할 만큼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뿐이다.
그래서 다시 본 드라마가 ‘낭랑 18세’. 2003년 6월 ‘KBS 드라마시티’에서 이선균, 한혜진 주연의 단막극으로 방영한 것을 2004년 초 이동건, 한지혜 주연의 16부작 미니시리즈로 제작한 드라마다. 15년이 지나도 ‘낭랑 18세’는 여전히 유쾌, 발랄했다. 보고 있는 동안 잠시 우울함을 잊을 만큼.
‘낭랑 18세’의 플롯은 단순하다. 어릴 적 할아버지들 간의 약속으로 정혼을 한 남녀가 결혼하고 난 뒤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게 되는 스토리다. 반전은 주인공에 있다. 여주인공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천방지축 만 18세 아가씨다. 반면 남주인공은 유서 깊은 종갓집 종손이자 중매쟁이들이 탐내는 훤칠한 서른 살 총각 검사다. 어울리지 않는 남녀 주인공이 전반적인 스토리를 유쾌하고 발랄하게 이끌어가지만, 때때로 맞이한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간다. 낭랑 18세만이 지닌 매력이다.
여 주인공인 윤정숙(한지혜)은 대학 진학에 관심 없고 딱히 꿈도 없지만, 강북의 자존심을 살린 깻잎머리와 짧은 교복치마 스타일을 사수하고 나이트클럽에서 신나게 춤추는 걸 즐긴다. 어릴 적 할아버지로 부터 정혼을 맺은 사내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사업실패로 집안이 망하고 야반도주한 터라 안동 권씨 집안과 소식이 끊긴 지 오래인 데다 지금은 21세기다. 게다가 정숙은 이제 갓 스물이 되려는 혈기방장한 만 18세 아니던가! 정숙은 정혼 사실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옛날 이야기로 치부한다.
그러나 약속을 중시하는 할아버지 권 진사는 기어코 정숙네를 찾아내고, 정숙을 남주인공인 권혁준(이동건)과 결혼시키려 한다. 여기서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설정이 하나 등장한다. 정숙과 혁준은 이미 나이트클럽에 몰래 출입한 여고생과 나이트클럽에서 미성년자 단속을 하던 검사로 강렬한 첫인상을 새긴 적 있다는 것. 결혼하느니 마니 옥신각신이 있었지만, 정숙은 예전에 한 번 마주친 도포 자락 휘날리며 제갈량의 ‘출사표’ 서책을 지녔던 자신의 첫사랑이 혁준임을 알아채고 결혼을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결혼한다.
이 둘의 연애를 방해하는 역할도 물론 존재한다. 악역 포지션을 맡은 혁준의 첫사랑 문가영(이다해)과 그를 지원 사격 하는 시누이 권선아(유혜정)가 그 주인공.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이미 결혼도 했겠다, 모범생 혁준이 쉬이 과거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결혼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서서히 서로에게 반하게 되거든.
게다가 한지혜, 이동건의 푸릇푸릇함을 보라고! 극중에서는 열 살 차이지만 실제로 네 살 차이에 불과한 이들은 이 작품에서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한껏 발산한다. 15년이 지난 지금 시선으로 봐도 달리 깔 만한 요소가 적은 것도 신기한 일이다. 정숙이 종갓집 종부라는 험난한(?) 위치에 서지만, 남편 혁준은 어린 아내가 종부 자리에만 매이지 않고 꿈을 찾도록 한껏 응원한다. 철없는 정숙은 툭하면 사고를 치긴 하지만 속내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 케케묵은 종갓집 종택을 지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종가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며 세상을 뜨면서도 어린 손자 부부의 앞날을 응원하는 할아버지 권 진사의 생각도 나무랄 데가 없다.
오해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꼬이고 꼬인 막장 요소가 크게 없고, 11회에 가영이 혁준을 포기한다든지 14회에 정숙이 임신하면서 몰입감이 떨어져 아쉬움이 남지만, 단순히 결혼으로 끝난 ‘KBS 드라마시티’ 단막극을 벗어나 이제 막 성인이 되는 여자와 결혼하면서 또 다른 성인의 자세를 배우는 남자의 성장 드라마까지 보여주며 ‘낭랑 18세’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니 우울할 때는 로맨틱 코미디를 보자. 기왕이면 달콤한 디저트도 곁들여서. ‘낭랑 18세’는 KBS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시 보기가 가능하다. 성우이자 배우인 김기현의 변사풍 내레이션이 돋보이는 예고편도 재미있고, 깨알같이 단역으로 스쳐 지나가는 이필모, 정경호 같은 스타의 얼굴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으니 눈을 크게 뜰 것.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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