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전장 부문에서 LG전자는 폴크스바겐과 깊게 협력 중이었는데 SK이노베이션이 폴크스바겐의 배터리 부문을 맡게 됐다. LG화학의 감정이 폭발한 계기다.”
익명을 요구한 전장업계 고위 관계자는 두 회사의 소송이 복마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최근 LG화학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SK이노베이션이 증거인멸 등 불법 행위를 시도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SK이노베이션은 ‘여론전’이라고 일축하고 기존 소송을 계속 이어나가겠다고 받아쳤다. 양사의 갈등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LG화학은 지난 14일 SK이노베이션이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한편 법정모독 행위를 저질렀다며 ITC에 조기 패소 판결을 비롯한 강도 높은 제재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LG화학은 지난 4월 ITC에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소송의 ‘증거개시(Discovery)’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이 이메일을 통해 수차례 자료 삭제를 지시하는 등 조직적·체계적 증거인멸을 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 LG화학은 67페이지 분량의 요청서와 94개 증거목록을 ITC 홈페이지에 13일(현지시각) 공개했다.
SK이노베이션이 ITC에 지난 8월 21일 제출한 ‘SK00066125’ 엑셀시트는 삭제됐던 파일이며, 이 시트의 980개 파일 및 메일은 소송과 관련이 있음에도 제출하지 않았다며 ITC에 포렌식을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이에 ITC도 지난달 “980개 문서에서 LG화학 소유의 정보가 발견될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며 “이번 소송과 관련이 있는 모든 정보를 찾아 복구하라”는 포렌식을 명령했다. 현재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증거보존 의무를 무시하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증거인멸을 했다고 주장한다.
ITC의 포렌식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SK00066125’의 한 엑셀시트만 조사한 채 나머지 74개 엑셀시트는 9월 말부터 자체 조사를 하는 ‘법정모독’ 행위를 벌이고 있다고도 주장한다. 이를 근거로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판결을 내리거나 LG화학의 영업비밀을 가로채 연구·개발(R&D), 생산, 테스트, 수주, 마케팅 등 영역에서 사용했다는 사실 등을 인정해달라고 ITC에 요청한 것이다.
이를 두고 SK이노베이션은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LG화학이 본 건 소송 패소를 우려해 본질을 흐리고 있으며,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고 반박한다. 그간 “합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LG화학이 최근 “SK이노베이션의 태도에 따라 소송 합의 가능성도 열어놓겠다”고 입장을 선회했다는 것이다. 이번 LG화학이 증거인멸을 주장하는 것은 본 건 승소 판결이 낮다고 판단해 억지 주장을 펼치는 한편, 합의 가능성을 언급해 출구전략 내지는 국면전환에 나선 것 아니냐는 설명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ITC의 증거개시 절차가 5개월가량 흘렀음에도 아직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LG화학이 뚜렷한 영업비밀 침해 정황이 확보되지 않자 증거인멸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보인다”며 “여론전과 동시에 협상 카드를 내민 것으로 본다”고 했다.
SK이노베이션에 따르면 ITC는 LG화학이 요구한 증거개시의 범위가 넓다며 수정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LG화학이 증거개시 범위가 좁아지자 소송의 실익을 잃었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당시 LG화학은 덴튼스에 더불어 레이섬 앤드 왓킨스, 피시 앤드 리처드슨 등의 로펌을 추가 선임하는 등 변호인단을 강화했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최근 주장과 무관하게 기존 소송을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입장이다.
ITC가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지만 판결 뒤 양사의 관계가 복원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전장 부품과 배터리 등은 자동차·전자·배터리 등 여러 분야 기업들의 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 소송으로 LG와 SK 관계 악화로 사업적 협력이 줄어 미국·중국·독일·일본 등에 추격을 허용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승차공유 회사와 완성차 제조사들이 손을 잡는 등 전기차·자율주행차 등 미래차 분야는 협력과 클러스터링이 가장 중요하다”며 “다만 국내를 이끄는 두 그룹이 갈등이 자칫 국내 전장 산업의 경쟁력을 저해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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