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날이 추워지면 영덕이 생각난다. 경상북도 영덕군이라는 지명만 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주제에 매년 이맘때면 영덕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리곤 한다. 이유는 자명하다. 대게가 되게 먹고 싶어지는 대게 제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덕이 대게로 유명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은근한 그리움을 간직한 곳임을 알려준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처럼 영덕을 대게와 ‘그대 그리고 나’로 떠올리는 사람이 숱할 것이다.
대게를 비롯해 각종 해산물이 그득그득 잡히는 바닷가 소도시 영덕은 박재천(최불암)이 배를 몰고 고기를 잡으며 자식들을 키운 곳이다. 똑똑한 모범생이던 큰아들 박동규(박상원)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며 동료인 윤수경(최진실)과 결혼을 결심하고 있고, 군 전역을 앞둔 둘째아들 박영규(차인표)는 돈 많은 여자를 잡아 크게 한 탕 올릴 계획에 몰두 중이다. 고명딸 박상옥(서유정)과 상옥과 동갑내기인 밖에서 낳아온 막내아들 박민규(송승헌)는 아버지 재천과 함께 영덕에 산다.
천상 바다 사나이인 재천은 비릿한 바다 내음을 떠나고서 살 수 없지만 자식들은 생각이 다르다. 가난한 집 장손인 동규에게 고향 영덕은 어릴 적 어머니를 배신한 아버지와 툭하면 사고치는 동생들이 사는 골치 아픈 곳이다. 한 방에 인생역전을 꿈꾸는 영규에게 영덕은 돈줄 없는 가난한 고향이고, 슈퍼모델의 꿈을 이뤄줄 서울로 가길 꿈꾸는 상옥에게도 영덕은 자신의 발목을 잡는 곳일 뿐이다. 재천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계순(이경진)을 어머니로 둔 민규에게 영덕은 얼굴도 모르지만 그립기 짝이 없는 엄마가 부재한 곳이고.
어쨌든 결혼 전 인사차 영덕에 내려왔던 수경이 동규와 잠시 이별할 정도로 재천네 상황은 객관적으로 그리 좋지 못하다(물론 수경이 이별을 결정한 데에는 가정 형편 외에도 처음 알게 된 배다른 동생의 존재 등 현격히 다른 집안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여곡절 끝에 동규와 수경이 결혼한 뒤 벌어진 상황을 보라. 수경 엄마 은순(김혜자)과 절친한 사이인 홍 여사(박원숙) 집에서 두 칸짜리 셋방에 신혼살림을 차렸건만 주먹다짐으로 사고를 친 민규를 동규네 신혼집에 맡기더니, 민규의 사고 뒷수습을 하느라 배를 팔아버린 재천과 모델이 되기 위해 서울로 가출한 상옥과 부잣집 운전기사에서 해고된 영규까지 모조리 모여 살게 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지 않나. 요즘 같으면 “당장 이혼이야!”를 외쳐도 백 번은 외쳤을 거다.
그런데 이 무지막지한 상황을 더없이 인간적으로 그려내는 게 ‘그대 그리고 나’의 매력이다. 엉겁결에 시아버지와 세 명의 시동생을 맡게 되어 억장이 무너지는 며느리 수경의 입장에 십분 공감하면서도 그 시가식구들의 면면이 너무나 애잔하고 짠하고 또 사랑스럽거든. 돈 한 푼 없어도 매사 당당하기 짝이 없는 ‘캡틴 박’ 재천이 수산시장바닥에서 막노동으로 번 꾸깃꾸깃한 돈을 수경에게 반찬값에 보태라며 쥐어주는데, 와, 되게 짠한데 멋져! 매사 건들건들 양아치 같지만 누가 제 동생들에게 함부로 대하면 물불 안 가리고 나서는 영규도 결코 미워할 수 없다. 언제나 슬픔이 가득한 눈빛을 한 민규는 말할 것도 없고. 끈끈하면서도 툭하면 사고를 치는 박재천네 식구들을 새로 가족으로 합류한 수경이 현명하게 융화시키는 과정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신구(新舊)를 아우르는 배우진도 환상적이었다. 수경과 동규 커플을 맡은 최진실, 박상원을 필두로 최불암, 김혜자, 박원숙, 이경진, 양택조, 심양홍 등 중장년 배우들이 지원 사격하고, 차인표, 김지영, 송승헌, 이본, 서유정 등 90년대 초중반 갓 데뷔한 젊은 배우들이 그 안에서 마음껏 뛰노는 형국이었다. 1997년 MBC연기대상을 수상한 최진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차인표였다. 군대에서 만난 채소가게 아가씨 김미숙(김지영)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고도 자신은 성공하고 싶다며 매몰차게 아이를 지우라 말하는 ‘쌩양아치’를 ‘사랑을 그대 품안에’ ‘별은 내 가슴에’의 멋진 왕자님이던 차인표가 연기했다고! 남자 버전 ‘달려라 하니’처럼 오매불망 엄마를 그리워하던 민규 역을 맡은 송승헌도 불안한 신인의 연기였지만 나름 필사적이었다.
가장 사랑스러웠던 건 의외로 ‘캡틴 박’ 재천과 나이 오십에 미혼인 푼수미 넘치는 홍 여사, 그리고 재천의 절친한 친구 ‘합죽이’ 역을 맡은 양택조의 삼각관계. 무뚝뚝한 듯 의외로 능숙하게 수작을 거는 터프하고도 낭만적인 바다사나이를 자연스럽게 연기한 최불암과 밉지 않은 애교와 푼수의 경계를 절묘하게 오가는 홍 여사의 박원숙, 그리고 드라마 초반 사라질 예정이었으나 그 존재감으로 마지막까지 함께하게 된 ‘합죽이’ 양택조의 조합은 정말 웃겨도 너무 웃겼고,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비록 시청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재천과 끝내 이어진 사람은 민규의 생모인 계순이었지만, 홍 여사와의 결합을 응원한 나 같은 사람도 꽤 있었을 거라고.
무엇보다 ‘그대 그리고 나’가 여전히 기억되는 건 90년대 가족극의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대 그리고 나’는 1997년 10월 11일 시작해 1998년 4월 26일 종영했다. IMF 외환위기와 정확히 맞물린다.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자가 되고,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자살하던 그 암울한 시기에, 가족 간의 화합을 그린 ‘그대 그리고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인간미 물씬 풍기는 캐릭터들을 데리고 ‘맞아, 사람 사는 게 저런 거지’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든 김정수 작가의 필력에 22년이 흐른 지금도 감사하게 된다. ‘김치 싸대기’로 통용되는 막장 요소를 넣지 않아도 삶의 희로애락을 진하게 뭉클하게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고향이 도시인 사람마저도 그리움 가득한 고향의 감정을 맛보게 해주었다. 62.4%라는 역대 드라마 시청률 6위의 기록이 그를 뒷받침한다.
드라마 마지막, 주제가 ‘비욘드 더 블루 호라이즌(Beyond the Blue Horizon)’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계순과 함께 자식들이 돈을 모아 선물한 배를 호쾌하게 몰며 드넓은 바닷가로 나아가던 재천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번 겨울에는 꼭, 영덕에 가서 ‘캡틴 박’의 낭만과 그 가족들의 끈끈한 정을 그리워하며 대게를 먹어야겠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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