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흔히 반도체 산업의 최대 라이벌로 삼성전자와 인텔이 꼽힌다. 매출액과 영업이익 규모에서 1, 2위 기업이기 때문이다.
두 회사를 라이벌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인텔은 비메모리 반도체를 주로 만들어서다. 두 회사를 반도체 산업의 ‘양대산맥’이라는 것은 맞지만, 주력 분야가 다르니 ‘라이벌’로 세우기는 어렵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인텔이 맞붙을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정보통신기술(ICT) 발달과 산업 고도화로 메모리·비메모리 반도체 간에 경계가 모호해져서다. 인텔은 9월 26일 새로운 옵테인 기술 개발 라인 운영 계획을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옵테인은 D램(휘발성 메모리)과 SSD(비휘발성 메모리)의 성격을 합한 기업용 메모리 기술로, 인텔이 독자 개발했다. 처리속도가 D램만큼 빠르고 가격은 SSD만큼 저렴하다. 더불어 업계 첫 144단 SSD 출시 계획까지 내놨다. 인텔이 메모리 반도체 진출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4~5년 전부터 클라우드 등 기업용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자 인텔도 하드디스크를 이용한 서버를 개발하는 등 시장을 넘봤다. 그 결과 옵테인 기술을 이용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본격 뛰어든 것이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인텔이 신제품 발표회를 한국에서 가진 것은 사실상 선전포고로 보인다. 인텔은 서버용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 처리 장치) 점유율이 높기 때문에 CPU와 옵테인·SSD를 패키지로 묶어 시장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앞으로 비메모리 반도체와 묶음 제품도 내놓을 수 있다. CPU와의 호환성과 전력 소모 등을 최적화한 메모리 반도체를 자사 비메모리 반도체와 세트로 제작하는 식이다. CPU가 복잡한 연산이나 대량의 데이터를 시스템화 해 처리하는 가운데 메모리 반도체가 보조하는 방식의 구조 설계가 가능하며, 제품화할 수 있다.
인텔의 전략이 위협적인 것은 비메모리 반도체의 시장 지배적 지위 때문이다. 인텔이 주로 생산하는 PC·서버용 CPU는 공급자 위주 산업이다. 자동차로 비유하면 CPU는 엔진, 메모리 반도체는 차체다. 차체를 아무리 많이 찍어도 엔진이 부족하면 차량을 생산할 수 없다. 엔진 생산량에 따라 차체 생산량을 결정하는 구조다. CPU는 사실상 인텔이 독점 생산하며, 인텔 CPU 공급량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움직이는 셈이다.
인텔은 반도체 생산을 오랜 기간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으로부터 제조를 위탁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 업체인 대만 TSMC에 맡겨왔다. 인텔이 메모리 반도체 생산 위탁을 TSMC에 맡길 경우 삼성전자와의 양산 경쟁도 가능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메모리 분야에서 지난 20여 년간 치킨게임을 벌인 끝에 이제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는 회사는 세계적으로 삼성전자·마이크론·SK하이닉스뿐이다. 다만 비메모리 분야의 대형 파운드리 업체들이 시장에 뛰어들면 또 다시 피 튀기는 경쟁이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인텔과 국내 반도체 업체 간 경쟁이 1~2년 안에 가속화할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인텔이 최근 공급 부족 해결책으로 밝힌 신규 투자 계획도 모두 비메모리 반도체 팹(반도체 제조 공장을 의미) 투자였다. 그러나 기업용 서버 시장이 더욱 확대되는 5년 뒤를 전후해 경쟁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삼성전자는 이에 대응해 4~5년 전부터 파운드리, LSI 등 비메모리 분야 강화에 나서고 있다. 2030년까지 133조 원을 투자해 파운드리 등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를 달성할 계획이다. 더불어 통신용칩과 AP 개발, 하만카돈 인수를 통한 전장 카포테인먼트(카·인포메이션·엔터테인먼트가 융합된 제품) 시스템 영업망 확대 등을 꾀했다.
최근 삼성전자는 영국의 반도체 설계회사 ARM이 설계한 CPU의 위탁 생산도 따내며 수주량을 늘리고 있다. 비메모리 부문 시장점유율을 높이겠다는 계산보다는 시장 변화 대응 차원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기술 없이는 앞으로 커지는 메모리 반도체 수요를 가져올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HP 등 글로벌 벤더들과도 폭 넓게 파트너십을 맺고 메모리와 비메모리의 결합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에 비해 SK하이닉스는 구체적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경기도 용인시에 짓겠다는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D램 등 메모리 반도체를 위한 곳이다.
인텔의 공세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변화 속에 국내 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할 거란 우울한 관측이 높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20년 전부터 시스템 반도체를 연구했지만 인텔과의 격차를 따라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내에도 적지 않은 팹리스(설계가 전문화되어 있는 회사) 회사들이 있지만 돋보이는 곳을 찾기 어렵다. 해외 유수 팹리스 업체들과의 파트너십을 강화하고 분야별로 파트너를 다변화 하는 등의 경쟁력 강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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