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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간 우호의 상징, 특급외교관 ‘판다’

남북경협실현 시킨 정주영의 ‘황소 외교’도 있어

2014.07.09(Wed) 11:04:59

   


지난 3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국빈 방한하며 판다 한 쌍을 한국에 들여왔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이 한 쌍의 판다는 작년에 한국에 온 따오기들과 함께 앞으로 양국 간 우호의 상징으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판다외교를 펼친 것이다. 판다는 중국이 타국에 우의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애용하는 동물이다.

국가 간 우호의 상징 판다

판다는 전 세계가 아무 이견 없이 중국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동물이다. 중국 정부는 이런 살아있는 보물 ‘판다’를 120% 이용하고 있다. 동물 외교 사절로 주요 국가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판다를 외교 수단으로 처음 활용한 것은 중일전쟁 시기인 194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중국을 지원해주던 미국에 감사의 표시로 판다 한 쌍을 보냈다. 전 세계인들이 판다의 귀여운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고, 각국에 선물로 보내지거나 임대된 판다들은 어린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특히 2006년 이후 캐나다 정부가 중국의 인권문제를 잇따라 제기하면서 두 나라 관계가 냉랭해졌지만 재작년 중국이 캐나다에 판다를 보낸 것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 판다가 특급 외교관의 구실을 한 셈이다. 그러나 판다외교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다.

재작년 7월 일본 도쿄 우에노 동물원에서 태어난 새끼 자이언트 판다가 폐렴으로 급사했다. NHK방송은 우에노 동물원 측이 조문소를 설치했으며,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새끼 판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일본이 판다를 죽였다”는 감정적인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가 “새끼 판다가 태어나면 이름을 ‘센센’이나 ‘가쿠가쿠’라고 짓자”고 제안한 것이 화근이었다. 센센과 가쿠가쿠는 일본과 중국이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한 글자씩을 따 지은 이름이다.

실패한 러·일 간 ‘동물외교’

국가 간 교류에 쓰이는 동물은 판다 외에도 많다. 지난 해 6월 한·중 두정상이 가진 정상회담은 ‘따오기 외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시 주석이 수컷 따오기 두 마리를 우리나라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이 따오기는 한·중 양국의 강화된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것은 물론 북핵문제와 같은 동북아 현안에 대해 상호협조하자는 의미를 갖고 있다.

1994년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시베리아 호랑이 한 쌍을 받았다, 일본으로부턴 2007년 너구리를 닮은 ‘레서판다’를 받은데 이어 2008년엔 천연기념물인 두루미 두 쌍을 받았다.

또 작년 9월 러시아와 일본이 쿠릴열도 영토 분쟁 등으로 악화된 양국 관계를 회복하고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는 차원에서 ‘애완동물 외교’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일본 아키타현 지사가 아키타현 토종개 아키타이누 강아지를 선물한 데 대한 보답으로 푸틴 대통령이 시베리아산 고양이를 선물했지만 일본 측 검역 통관이 지연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

애초 양국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이뤄질 러·일 양국 정상회동 이전에 애완동물을 맞교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복잡한 검역 절차로 일정에 차질이 발생해 애완동물 교환이 힘들게 된 것이다. 때문에 APEC 정상회의의 분위기를 좋게 하려던 양측의 노력이 빛을 잃게 됐다.

   


남북경협 실현시킨 ‘황소 외교’

동물을 이용해 대치국면을 극적으로 전환시킨 예도 있다. 바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다. 1932년 당시 17세였던 정 명예회장은 ‘찢어지는 가난’에서 탈출하기 위해 선친이 판 소 1마리 값을 훔쳐 서울로 올라왔고, 이 돈으로 ‘현대家’를 키워냈다. 당시 소 한 마리의 가격은 70원이었다. 아버님에 대한 죄송한 마음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늘 가슴 한 곳에 아픔을 담고 살았던 그는 남북이분단된 지 반세기 만에 민간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판문점을 통해 방북을 실현했다. 1998년 6월 16일 499마리의 소를 끌고 북한을 방문한 후 그해 10월 27일 501마리의 소를 이끌고 다시 북한을 찾아가 1000마리를 기증했다.

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은 외환위기 직후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대치상태를 지속했던 남북 관계를 민간 차원의 경제협력으로 풀어내는 기폭제가 됐다.

이를 계기로 1차 방북에서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 추진 등에 합의한 뒤 2차 방북 직후 금강산 관광이 시작돼 1998년 11월 18일 ‘금강호’가 첫 출항을 했다. 2000년 6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으며 같은 해 8월 남북은 개성공단 건립에 합의했다. 남북경협이 ‘소떼방북’을 계기로 실현된 것이다.

이 당시 ‘소떼’는 남북한 협력의 상징으로서 어떤 외교관보다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고 정 명예회장은 “소떼를 몰고 갈 때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해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이는 분단의 장벽도 함께 허문다는 의미다.

당시 영국 인디펜던트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핑퐁 외교’가 있었다면 남한과 북한 사이에 ‘황소 외교’가 있다고 평했다.

구경모 기자

chosim34@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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