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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그곳의 청춘은 금빛으로 빛난다 '태릉선수촌'

떨리고도 잔인한 공간에 피는 우정과 사랑…누구 하나 처짐 없는 사랑스러운 캐릭터 '한가득'

2019.10.25(Fri) 18:35:27

[비즈한국] 가끔 흘러간 스타들을 생각한다. 시대를 풍미했던 그 연예인은 지금 어떻게 지낼까, 신화를 기록했던 그 스포츠 영웅은 지금 후배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 최근엔 김경욱이란 이름을 새삼 입에 올렸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과녁 정중앙의 초소형 카메라를 두 번이나 부쉈던 ‘퍼펙트 골드’ 궁사 김경욱의 조카가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김경욱의 이름을 되뇌면서 ‘태릉선수촌’이 생각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MBC 베스트극장’에서 8부작으로 방영했던 ‘태릉선수촌’은 양궁, 유도, 수영, 체조라는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꿈과 사랑을 다뤘던 독특한 드라마였거든. 

 

2005년 10월 29일부터 30분짜리 8부작으로 4주간 방영한 'MBC베스트극장'의 ‘태릉선수촌’. 청춘을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명랑하고 따스하고 짠하게 비추는 시선이 낯익다면 당신의 눈썰미가 옳다. ‘커피프린스 1호점’ ‘치즈 인 더 트랩’의 이윤정 PD의 연출작으로, 스타 연기자 아닌 신인급 배우들을 기용해 이례적인 호평을 받았다.  작가는 ‘베토벤 바이러스’ 등을 집필한 홍진아 작가. 사진=MBC 홈페이지

 

지금은 대부분 스포츠 종목 선수들이 충북 진천군의 진천선수촌으로 터전을 옮긴 상태지만, 태릉선수촌은 오래도록 대한민국 유일의 국립 종합 스포츠 트레이닝 센터로 이름을 날렸다. 심권호나 김연아, 앞서 말한 김경욱처럼 태릉을 거쳐 간 기라성 같은 스포츠 스타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이 따낸 빛나는 메달들과 그들이 받았던 명예와 찬사를 상상해보라. 동시에 태릉은 심권호와 김연아가 아닌 무수히 많은 선수들이 피땀을 흘리고도 그 무엇도 얻어내지 못하는 잔인한 공간이기도 하다.

 

드라마 ‘태릉선수촌’은 매 순간 희비가 엇갈리는 그 떨리고도 잔인한 공간에 있는 청춘들을 비춘다. 자신이 천재인 줄 알았으나 어느 순간 천재가 아님을 깨달은 양궁의 방수아(최정윤), 지독하게도 운이 따라주지 않아 만년 2진이었으나 그 진가를 드러내는 중인 유도의 홍민기(이민기), 남자수영 최초로 올림픽 결승에 진출했었으나 점점 기록이 떨어지고 있는 수영의 이동경(이선균), 재능을 타고났지만 대인관계에는 서투른 체조의 정마루(송하윤, 당시 김별)라는 네 명의 청춘이다.

 

양궁과 유도라는 올림픽 시즌 메달 노다지 사냥에 나서는 효자 종목의 선수인 방수아와 홍민기. 내내 천재의 길을 걷다 슬럼프에 빠진 수아와 내내 부진했다 두각을 드러내는 홍민기의 상황은 한 치 앞을 가릴 수 없는 스포츠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 드라마 캡처

 

선발전 때마다 지독한 컨디션 난조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민기는 우연히 운동장에서 올림픽 2관왕 수아의 금메달을 발견하곤 행운의 상징으로 삼고자 돌려주지 않는다. 금메달을 매개로 얽히지만 민기가 그토록 바라던 국가대표가 되는 순간, 수아는 선발전에서 탈락한다. 대표로 선발된 선수 중 한 명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곧 수아는 태릉선수촌으로 복귀하지만, 한 번 빠진 슬럼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전혀 닮은 점이 없어 보이는 수아와 민기. 그러나 한없이 순수하고 저돌적으로 대시하는 민기에게 이내 수아는 빠져든다.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어. 이렇게 다 보이는데, 다 보여주는데"라는 수아의 대사가 민기의 매력을 십분 설명한다. 사진=MBC 홈페이지

 

수아와 민기가 처한 상반된 설정은 인생의 축소판과 같은 스포츠의 단면을 보여준다. 어릴 적부터 1등을 도맡아 왔고 심지어 금메달을 두 개나 딴 수아는 새로이 신궁이라 불리는 후배의 출현으로 좌절한다. 반면 메달 여부와 메달 색깔로 등급이 갈리는 태릉 안에서 천민이라 자조했던 만년 2진 민기처럼 어느 순간 두각을 드러내며 17연승으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비인기 종목이어도 올림픽 시즌마다 메달을 쓸어 모으는 효자 종목 특성상(그때만 보이는 반짝 관심이기도 하지만), 뜨고 지는 스타들이 부지기수이기에 팽팽한 긴장감을 놓칠 수 없다. 당장 현실에서도 리우 올림픽 2관왕이던 장혜진이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것처럼.

 

수아로 인해 서로 신경전을 벌이는 민기와 동경. 어른의 여유를 지닌 '태릉모범생' 동경에게 치기 어리지만 한없이 뻗댈 수 있는 자신감의 민기는 라이벌로나 스포츠 동료로나 부럽기 그지없는 존재로 보인다. 사진=드라마 캡처

 

수아의 오래된 연인이자 한국 남자수영 올림픽 파이널 진출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동경의 상황 또한 녹록하지 않다. 수영계에서 환갑이라 불릴 만큼 점점 드는 나이와 계속 떨어지기만 하는 기록,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비인기 종목의 한계 등이 동경을 압박한다. 수아와 민기처럼 동경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 마루인데, 마루 역시 비인기 종목인 체조에서 타고난 천재성으로 메달 가능성이 엿보이는 선구자(?)의 입장이지만 동경과 달리 창창한 열일곱 고등학생이라는 점이 그렇다. 

 

오래된 연인이라 안정적이던 수아와 동경. 민기에게 흔들리는 수아에게 동경은 청혼하지만 그들은 끝내 헤어지고 만다. 그럼에도, 수영장에서 수아에게 새삼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자못 인상적이었다. 사진=드라마 캡처

 

올림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매진하지만 고작해야 20대, 30대 초반에 불과한 청춘인 만큼 이들은 한없이 불안하고 초조하다. 개중 나이가 있는 동경이 제법 어른인 척 여유를 보이지만 그 역시 자신의 상황과 연인 수아에게 저돌적으로 대시 중인 민기를 보며 속으로 불안할 뿐이다. 민기를 한없이 좋아하지만 미성년자라는 한계와 수아를 좋아하는 민기의 마음 때문에 좌불안석인 마루도 그렇고, 서로 호감을 느껴가지만 ‘이것이 정말 사랑일까, 계속 전진해도 되는 걸까’ 고민하는 수아와 민기도 어리긴 마찬가지다.

 

알에서 갓 깨어 처음 본 존재를 엄마로 인식하는 오리처럼 민기를 각인해 버린 마루. 천재성을 지녔지만 아직 불안정한 10대인 마루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귀엽고 독특하고 인상적인 존재였다. 사진=드라마 캡처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한없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 신체 능력이 우선되는 스포츠 특성상 제법 나이가 있는 동경은 은퇴를 결심하지만 인생 전체로 봤을 때 고작 서른 남짓의 그는 자신이 민기에게 말한 것처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앞뒤 안 가리고 막 쑤셔 놓고, 욕 먹고도 뻔뻔하게 버텨도’ 좋은 때다. 안정되고 오래된 연인이던 수아와 동경이 헤어지고 대책없어 보이는 ‘무데뽀’ 민기가 수아와 맺어지는 것처럼, 인간사 누구나 그렇겠지만 풋풋하게 젊은 그들의 앞날에 정해진 예정이란 없다. 하물며 부상으로 12년간 매진했던 체조와 결별하는 마루의 인생 또한 그냥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니까.

 

한국 남자수영 신기록을 달성한 동경이지만 그에게 사람들이 묻는 것은 왜 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점점 기록이 떨어지느냐, 나이가 많은데 은퇴는 언제쯤 고려하느냐 하는 무례한 질문뿐이다. 사진=드라마 캡처


 매력적인 캐릭터만 있어도 좋은 드라마의 반은 먹고 들어가는데, ‘태릉선수촌’은 심지어 네 캐릭터 모두가 매력적이고 사랑스럽고 애틋하다.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 같은 수아, 애써 불안을 감추고 어른의 여유를 보여주는 수아의 오래된 연인 동경,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생기가 넘쳐나는 민기, 알에서 깨어난 오리처럼 강렬하게 민기를 각인해버린 마루 중 누가 더 매력적인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던 기억이 새록하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지금쯤 어디선가 열심히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흐뭇할 미소가 지어진다. 심지어 마루는 지금 고작 30대 초반일 텐데 말이야.

 

부상을 입고 다시는 체조를 할 수 없다는 선언에 재활을 거부하기도 했던 마루. 12년간 체조에만 매진했던 사람이 한 순간의 사고로 영영 그 목표를 버려야 하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사진=드라마 캡처

 

‘태릉선수촌’을 다시 보고 나니,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수많은 선수들을, 그리고 그들을 바라볼 우리의 시선을 잠깐 생각하게 된다. 올림픽 같은 큰 국제 규모의 대회 때만 알량한 애국심에 젖어 메달을 따는 선수들을 응원했던 얄팍한 인심을 떠올린다. 우리는 김연아의 성공에 환호하지만 그가 정상에 이르기까지 겪어온 인고의 시간과 열악한 제반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민기의 말처럼 “관중이 있길 하나, 그렇다고 뭐 누가 알아봐주길 하나, 쥐꼬리만한 월급에” 힘들어하다 결국 스포츠계를 떠나는 많은 선수들의 눈물을 알아주지 않으니까. 그래도, 나처럼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선수촌의 수많은 청춘들에게 미약한 응원을 던진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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