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전쟁’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이번엔 SK이노베이션이 LG그룹의 핵심 자회사 두 곳을 동시에 소송전에 끌어들이면서 재계 3·4위 그룹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그동안 두 그룹 사이 물밑 협상부터 청와대의 중재 움직임까지 있었지만 오히려 다툼이 커진만큼 양측 갈등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LG화학의 미국 내 자회사인 LG화학 미시간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와 연방법원에, LG전자도 연방법원에 제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의 특허를 침해했고, LG전자는 LG화학으로부터 배터리 셀을 공급받아 배터리 모듈과 팩 등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는 게 이유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사업 윤예선 대표는 “LG화학과 LG전자가 특허를 침해한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내 기업 간 선의 경쟁을 통한 경제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국민적인 바람과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해 보류해 오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고 말했다.
업계에선 미국 소송을 두고 ‘초강수’라고 평가한다. ITC와 미국 법원의 강력한 ‘증거개시 절차’와 징벌적 손해배상 때문이다. 증거개시 절차는 정식 변론에 돌입하기 전 소송 당사자가 정보나 자료를 제출·공개하는 법적 의무다. 법원이 요구한 증거를 모두 제출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면 소송 결과에도 영향이 미친다. 한국 법원에도 같은 절차가 있지만 미국이 더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는 산정되는 손해배상액이 막대하다. 소송에서 패하는 쪽은 어떤 형태로든 타격이 불가피하다.
양측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4개월 전부터다. 지난 4월 30일 LG화학은 보도자료를 내고 미국 ITC와 연방법원에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자동차 배터리 기술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LG화학은 자동차 배터리 후발 주자인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 측 인력과 영업비밀을 지속적으로 빼갔다고 주장했다. 당시 LG화학은 소장에서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영업비밀을 부당하게 활용해 개발한 배터리를 폴크스바겐의 3세대 전기차에 공급하게 됐다”고 했다.
SK이노베이션은 곧바로 ‘근거 없는 발목 잡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인력 빼돌리기’가 아니라 LG화학의 낮은 처우와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기업 문화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등 LG화학의 사내 문화와 실적 등에 대한 날선 비판을 불사했다. 양측은 이날을 기점으로 나흘 동안 입장문 등의 형태로 반박과 재반박을 반복했는데, 기업 사이의 법적 갈등이 이처럼 공개적으로 중계되는 건 이례적이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에 ‘LG화학이 미국에서 근거 없는 소송을 제기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취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과 함께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SK이노베이션이 미국이 아닌 한국 법원에 소송을 냈었던 만큼 확전이라기보다는 지난 4월 LG화학이 낸 소송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만 평가됐다”며 “다만 이번 소송은 다르다. 강대강으로 부딪치는 ‘맞대응’ 성격이 크다. 이제는 어느 한 쪽도 쉽게 물러설 수 없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양측이 화해할 것이란 관측은 여러 차례 나왔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가 가시화된 시점이 대표적이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은 ‘제2의 반도체’로 불릴 정도로 정부와 민간기업 모두가 육성하려는 사업인데, 배터리 핵심 소재인 분리막의 대일본 수입이 원활치 않을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오면서 두 기업에 시선이 쏠렸다. SK이노베이션은 이 분리막을 생산하지만 LG화학은 일본 업체들로부터 수입해 오고 있어서다. 실제 SK이노베이션은 ‘국내 경쟁사(LG화학)에 분리막을 공급할 수 있다’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LG화학은 이와 관련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청와대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화해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주재하는 삼성, 현대차, SK, LG, 롯데 등 ‘5대 기업 모임’에서다. 이 모임은 일본 수출 제한 조치 대응 차원에서 지난 8월 8일 처음 시작됐다. 외부에 알려진 건 두 차례지만 상시적으로 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SK그룹에서는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이, LG그룹에서는 권영수 (주)LG 대표이사 부회장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권영수 부회장과 김준 사장은 서울대 경영학과 동문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김준 사장은 “일본 이슈로 어려운 때인 만큼 대화를 통해 원만하게 풀어가길 원한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김상조 실장도 경제 여건이 좋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해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SK이노베이션 측은 지난 8월 30일 소송 방침을 밝히기 직전까지도 LG화학 측과 대화를 시도하고 ‘맞소송’ 시그널까지 보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도 “원활한 해결을 위해 LG화학에 여러 차례 접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이 ‘공식적, 직접적’으로 대화를 요청해온 적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SK 쪽이 일방적으로 화해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업계에선 LG화학도 완전히 문을 닫아둔 건 아니었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에선 양측의 주장이 다른 이유가 두 기업의 의사결정과 보고체계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양쪽이 대화 대상자를 선정하는 데부터 이견이 컸다. 각 사 대표자들뿐만 아니라 실무자들까지 직함이 제각각이라 소통 채널을 정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결국 대화는커녕 감정의 골만 깊어졌다”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은 소송을 공식화한 이후에도 대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SK 측은 “LG화학·전자는 소송 상대 이전에 국민 경제와 산업 생태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협력해야 할 파트너로서 의미가 더 크다는 게 SK 경영진의 생각”이라며 “언제든 대화와 협력으로 해결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LG 측도 대화의 가능성은 열어뒀다. 다만 조건부다. LG화학은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 이에 따른 보상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할 의사가 있다면 언제든 대화에 응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사실상 ‘항복’이라는 조건을 내건 셈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갈등은 장기화될 전망이다. 최근 양사 CEO가 마침내 회동을 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지난 9월 16일 오전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1시간가량 서울 모처에서 회동을 진행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물밑에서 조율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양사 CEO는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한 채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이들은 추후 회동 일정조차 잡지 않았다.
오히려 LG화학이 지난 5월 ‘산업기술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SK이노베이션 직원 등을 서울지방경찰청에 고소한 데 따른 경찰의 압수수색이 진행되면서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지난 9월 17일 SK이노베이션 본사 등을 압수수색했다. CEO 회동 하루 만이다. 압수수색 직후 SK이노베이션은 권영수 LG그룹 부회장까지 거론하며 조롱 섞인 입장문을 냈고, LG화학은 수사관련 안내문을 배포하며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였다.
양사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소송전이 장기화되면서 소송비용도 천문학적으로 사용될 것으로 관측된다. LG와 SK 측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양사는 이번 소송전으로 인해 미국 로펌에 매달 50억여 원을 각각 지급하고 있다. 기업 간 영업비밀 침해나 특허 침해 소송 등은 통상 3년 가랑 소요되는데, 소송이 복잡한 만큼 기타 추가 비용 등을 감안하면 이들의 소송 비용은 약 4000억~5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양사의 갈등에 중국과 일본 등 배터리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두 회사 모두 전기차 배터리를 신사업으로 키우고 있는데, 분쟁이 끝까지 가서 한쪽이라도 해외 시장 판로가 막히면 웃는 쪽은 일본이나 중국, 유럽의 배터리 동맹이라는 얘기다. 이 경우 이번 소송에서 승리한 쪽도 장기적으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사실상 승자가 없는 전쟁이 되는 셈이다.
업계에서는 LG그룹과 SK그룹의 총수가 만나 담판을 짓기 전까지는 양사가 합의점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양사 CEO 회동이 불발된 만큼 결국 해결할 수 있는 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이라며 “양측이 직접 만나 대화를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호민 기자
donkyi@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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