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계절이 바뀌고 있다. 9월이 되기 무섭게 여름의 흔적은 온 데 간 데 없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베를린에서 보내는 마지막 가을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에 젖어 ‘이 가을을 만끽해야지’ 했는데, 며칠 사이에 차디찬 겨울 공기마저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베를린에 와서는 매년 간절기 옷이 전혀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짧은 팔에서 긴 팔로 바뀌는 찰나, 곧 패딩 점퍼와 코트가 필요해지니까.
작년엔 대체 뭘 입었지, 하는 고민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매일 뚝뚝 떨어지는 기온을 보면서 나는 옷장 앞에서 서성인다. 한국에서처럼 출근하는 것도 아니고, 베를린 사람들이 본인은 물론이요 남의 ‘패션’에도 그다지 신경 쓰는 부류가 아니라 다행이다. 매일 아이를 데려다 주고 데려오기 위해 학교로 ‘출근도장’을 찍지만, 어쩌다 이벤트가 있는 날 외에는 매일 차려 입는 것도 ‘오버’인지라 나의 룩은 편안함과 보온 등 실용성을 최대로 한 동네용 외출차림이다.
베를린에 산 기간 내내 그랬던 건 아니다. 패션에 관심도 많고 옷을 좋아했던 나는 한국에 살 때 드레스 룸이 넘치도록 옷을 소장했다. 베를린으로 이사하면서 엄청난 양을 정리했고, 일부는 친정과 시댁 등에 맡겼는데도 여기까지 들고 온 옷들이 꽤 많았다. 해외 이사 당시 짐 정리를 하러 온 이삿짐 센터 관계자가 “이걸 다 가져가는 건가요?”라고 말했을 정도. 회사에 다니진 않겠지만 TPO(Time·Place·Occasion)에 따른 복장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는 여러 스타일의 룩을 포기하지 못하고 다소 무리를 했다.
오판이었다. 베를린으로 온 첫해 여름부터 날씨는 예상을 빗나갔다. 8월 말부터 한국의 10월 중순 날씨를 보이더니 5개월 이상 두터운 겨울 시즌 옷만 빛을 발했다. 나름 첫해에는 가져온 옷들을 적극 활용해보고자 ‘차려 입는’ 불편함을 감수했지만, 매일 오가는 동선이 뻔하고 날씨마저 받쳐주지 않으면서 점점 ‘베를리너’ 스타일이 되어갔다. ‘패셔너블’은커녕 남의 눈 전혀 신경 안 쓰고 실용성을 최대화한 베를리너 스타일.
겨울 시즌엔 누구 하나 색깔 있는 외투를 입지 않고 회색과 검은색의, 잦은 비를 대비하기 위한 방수 기능을 갖춘 점퍼로 무장한 베를리너들이 길거리를 가득 채운다. 오후 4시면 해가 지는, 안 그래도 암흑천지가 되는 겨울에 ‘검은’ 사람들로 가득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자체로 우울해질 때도 많다. 유행하는 스타일대로 잘 차려 입은 사람들을 보면 ‘관광객’이라고 추측이 될 정도로 베를린 사람들의 패션은 그들만의 정석이 있다. 딱히 유행이 없는 것이 베를리너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얼마 전, 베를린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학을 전공하는 독일 대학생과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여기서도 젊은 친구들은 그나마 패션에 신경을 쓰는 편이기도 하고, 그 친구는 한류 등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스타일을 선보이곤 해 눈을 즐겁게 할 때가 많았다. 나는 말했다. “베를린에 와서 몇 번 쇼핑을 갔는데, 그때 결심한 게 있어. 독일에선 절대 옷을 사지 않겠다는 거였지. 나는 옷 사는 걸 좋아하는데 맘에 드는 스타일을 전혀 찾을 수가 없더라고. 베를린 사람들은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나 봐? 왜들 그렇게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는 거지?”
그 친구는 웃으며 어느 정도 내 말에 동의했다. “실용성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날씨가 워낙 오락가락하고 겨울도 길잖아요. 옷을 선택할 때 어떻게 예쁘게 입을까가 아니라 오늘 날씨에 맞춰 어떻게 입을까를 고민한다고 해야 할까요. 가을, 겨울엔 많이 춥고 비가 자주 오는데 세탁을 자주 할 수 없으니 아우터는 무조건 어두운 색, 방수가 되는 옷을 선호하죠. 저도 컬러풀한 옷을 좋아하는데, 겨울 시즌에 밝은 색감의 아우터는 베를린 옷 가게에서 찾기 힘들긴 해요.”
미안하지만 내가 옷을 사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가 색감만은 아니었다. 부가세가 19%에 달하는 독일 상황 상 옷 가격이 한국에 비해 비싸기도 하고, 비싼 만큼 퀄리티가 좋은지 모르겠고, 디자인도 눈에 띄는 제품을 찾기 힘들었다. 베를린에 온 초창기 ‘패션’에 나름 신경 쓰고 다니던 때, 길을 가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옷 예쁘다’는 말을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농담 반 ‘한국에서 싸고 예쁜 옷을 가져다 팔면 불티나게 팔리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2년 동안 어쩌다 기능성 옷을 구매하긴 했지만, ‘옷을 사지 않겠다’던 결심은 다행히 잘 지켜지고 있다. 있는 옷도 다 활용 못 하는 판에 새 옷은 무슨. 예상했던 TPO들이 생기지 않아서, 어느새 패션만큼은 베를리너가 된 관계로 묵혀진 많은 옷은 빛 한 번 못 보고 조만간 이삿짐 신세가 돼야 할 지경인 것을. 이러다 한국 가면 감 떨어진 패션 센스로 주목 받는 거 아닌지? 그땐 ‘유행을 좇지 않는 시크한 베를리너 룩’이라고 포장해야지.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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