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패션디자인 소품 플랫폼을 창업한 A 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가 만든 것과 유사한 제품을 대기업 유통회사 L 사와 C 사가 버젓이 여름 시즌 특별판매에 나섰기 때문이다. A 씨는 올 3월 L 사와 C 사로부터 각각 “투자 의향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IR(기업설명회)을 하며 사업 모델과 제품을 모두 공개했다. 그러나 그 뒤로 연락은 없었다. A 씨는 “IR 때 설명한 회사 제품을 그대로 흉내 낸 것”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헤드헌팅 플랫폼 스타트업을 만든 B 씨 역시 대기업의 횡포에 곤욕을 치렀다. 이 회사를 통해 인력을 선발한 대기업들이 응당 치러야 할 인력 유치 비용을 지급하지 않은 것이다. 기업과 취업자가 입을 닫아버리면 B 씨로서는 취업 여부를 알기 어렵다. B 씨는 “중소기업이 겪어야 할 통과의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기업들의 기술 탈취와 갑질에 스타트업들이 신음하고 있다. 기업 문화가 성숙해지면서 10년여 전과 비교해 대기업의 ‘갑질’은 많이 개선됐다. 그러나 대기업의 지위를 이용해 스타트업의 사업 모델을 흉내 내는 등의 부정행위는 여전히 횡행한다.
올 초 국내 최대 벤처캐피털(VC) 중 하나인 소프트뱅크벤처스가 문제가 된 적 있다. 소프트뱅크벤처스의 심사역이 전기스쿠터 공유업체 올룰로의 기술을 베껴 비슷한 스타트업을 차린 것. 투자 유치를 위해서는 핵심 사업 자료와 데이터를 VC와 공유해야 하는데, 이 자료를 심사역이 멋대로 사용했다는 것이 올룰로 대표의 주장이다.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VC와 스타트업은 기밀유지협약(NDA)을 맺는다. 기술 유출이나 탈취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올룰로 대표가 ‘설마’ 하는 마음에 NDA를 맺지 않은 게 화근이 됐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VC가 스타트업의 기술을 탈취하는 일은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금기시된다. 자칫 기업들이 해당 VC를 기피하게 되는 등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을 흐릴 수 있어서다.
그러나 스타트업 열풍 속에 대기업의 신기술 발굴 수요도 커지면서 되레 기술을 탈취하는 등의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한 스타트업 컨설턴트는 “대기업들의 벤처 관련 부서 소속 임직원들은 얼마나 유의미한 신규 비즈니스를 발굴했느냐에 KPI(핵심성과지표)가 결정된다”며 “이 때문에 단지 기업을 발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자사의 사업화 모델로 가져가려는 일이 빈번하다”고 지적했다.
대기업 관계자들이 ‘카피캣 전략’을 마음껏 쓰는 것은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잃을 수 있는 손실보다 커서다. 대개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경험이 부족하고 법적 문제 처리에 미숙해서 기술 베끼기에 적절히 대응하기 어렵다.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가더라도 기술 탈취를 입증하기 쉽지 않고 처벌 규정도 미약하다.
소송에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뺏기기 때문에 대부분 창업자들은 기술을 뺏겨도 소송을 포기하고 다음 사업에 나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특히 부정경쟁방지법이나 저작권법은 재판 기간이 길어 회사 입장에서는 장기간 소송에 나서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비즈니스 모델을 고안한 사람을 구제하는 법적 장치가 있지만, 한국은 특허 등록이 우선이며 법적 보호 범위가 불분명하다. 이에 특허청은 지난 6월부터 개정된 부정경쟁방지법 시행에 돌입해 아이디어 도용과 베끼기를 단속한다는 입장이나 실제 현장이 느끼는 온도는 아직 미미하다. 이런 대기업의 기술 탈취 행태는 창업자들의 의욕을 떨어트리는 등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흐린다.
이에 조성욱 신임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일성으로 기술 중소 벤처기업들의 기술을 뺏거나 부당하게 단가를 내리는 등의 불공정 행위 감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표준계약서 도입 업종을 넓히고 공정거래협약 확산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한 스타트업 대표는 “많은 것이 부족한 스타트업으로서는 네트워킹이 핵심이다. 그런데 상호 신뢰가 없다면 네트워킹 구축은 불가능해진다”며 “당국의 관리·감시만으로는 비법적 행위를 막는 데 한계가 있다. 상호 암묵적 신뢰는 물론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NDA 의무화 등의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서광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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