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라 프렌치 테크(La French Tech)’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라 프렌치 테크’를 소개한 글이나 기사를 보면 ‘프랑스의 스타트업 육성정책(이자 생태계)’, ‘프랑스의 스타트업 육성 및 해외진출 지원 정책’ 등으로 설명한다. 대략 뭔지는 알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라 프렌치 테크’의 공식 사이트(lafrenchtech.com)에 들어가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영어와 프랑스어로 표기된 설명을 우리말로 옮기면 대략 아래와 같다.
“라 프렌치 테크는 프랑스의 스타트업 생태계와 그 안의 모든 것(바이오사이언스에서 온라인 마켓플레이스까지)을 총칭하되 세계 어디에서 왔든지 상관없다. 이는 프랑스를 글로벌 테크 챔피언을 창업하고 성장시키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만들고자 하는 프랑스 정부의 육성 정책이기도 하다.”
어떤 소개 글은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캠퍼스로 1000개 이상의 스타트업을 호스팅하고 있는 파리의 스테이션 F를 ‘라 프렌치 테크’의 치적 내지 성과로 설명한다. 스테이션 F가 프랑스 스타트업 생태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정부의 ‘육성 정책’이라기보다는 자비에르 니엘 개인의 비전과 리더십의 결실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가 설립한 또 다른 프랑스 스타트업 생태계의 아이콘 ‘에콜 42’도 마찬가지다. 굳이 따지자면 프랑스 정부는 자비에르 니엘에게 협조하고 나중에 슬쩍 숟가락을 얹은 정도랄까.
또 다른 소개 글은 ‘라 프렌치 테크 비자’를 언급한다. 이는 프랑스 진출을 희망하는 해외의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비프랑스인 인재를 유치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선정된 스타트업은 일정 기간 프랑스 내 41개 창업 센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소정의 펀딩을 지원하는 한편, 까다로운 프랑스 취업 비자 발급 절차를 최대한 간소화해 신속하게 프랑스의 스타트업 생태계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프랑스 정부의 주도적인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육성 정책’의 정의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라 프렌치 테크’의 일부에 불과할 뿐 전체를 아우른다고 볼 수는 없다.
스타트업에 대한 자금 지원을 위해 프랑스 정부가 조성하고 주도하는 펀드는 어떨까. 프랑스 정부는 2014년 국책 투자은행인 Bpifrance를 통해 2억 유로 (2700억 원)의 스타트업 투자 펀드를 조성하고 AI 기술에 15억 유로(약 2조 원)를 투자할 것을 발표하는 등 약 100억 유로(약 13조 원) 규모의 스타트업 투자를 약속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프랑스의 경제 규모로 볼 때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명목 GDP 기준 프랑스 경제의 3분의 2 규모인 대한민국도 10조 원의 펀드와 20조 원의 대출 프로그램 등 30조 원 정도의 스타트업 지원책을 내놓는 것에 비하면 외려 박하다 할 지경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라 프렌치 테크’란 뭐란 말인가. 내게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얘기하겠다.
라 프렌치 테크는 붉은 종이로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인 수탉을 접은 모양인 로고이다. 그게 전부이며, 그걸로 충분하다.
실체가 없다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런 단순한 메시지와 브랜딩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화 선진국 프랑스의 소프트 파워와 맞물려 강력한 시너지를 창출한다. 복잡한 정책과 지원책을 숙제하듯 백화점 식으로 쏟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라 프렌치 테크’의 강력한 힘은 ‘네트워크’와 ‘연결’에서 나온다. 기존에 지역별, 기관별로 산재하던 개별적인 스타트업 생태계들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브랜딩이다. 일종의 라벨링 또는 인증 정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13년 당시 올랑드 대통령의 특명으로 ‘중소기업·혁신·디지털 경제 장관’이던 한국계 플뢰르 펠르랭에 의해 ‘라 프렌치 테크’가 처음 출범했다. 그 이전 프랑스의 혁신 정책은 전국 19개 지역을 클러스터로 만들어 신사업 육성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각 지역의 역사적 특성에 맞는 산업군을 육성한다는 취지에는 부합했으되 국가 단위의 일관된 방향성 부여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를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묶어 통일성을 부여한 것이다.
‘라 프렌치 테크’의 협력 기관인 41개 지역 스타트업 육성 기관(인큐베이터 또는 액셀러레이터)은 이미 2013년 이전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다. 가령 내가 살고 있는 그르노블에는 3개의 인큐베이터가 ‘라 프렌치 테크’ 공식 협력 기관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각각 2005년, 2012년, 2013년에 이미 설립되었다. 각각 바이오·헬스, 전자·사물인터넷(IoT), 에너지 등으로 특화되어 독립적으로 활동하던 이들 인큐베이터들이 ‘라 프렌치 테크’라는 이름과 수탉 모양 로고 아래 모인 것이다.
특히 감탄스러운 것은 붉은 수탉 종이접기를 지역별 클러스터에 맞게 변형한 로고 디자인이다. 가령 스트라스부르를 주도로 하는 독일 접경 알자스 지방은 황새, 기계 코끼리가 명물인 프랑스 서부 낭트는 코끼리, 유럽 항공 우주 산업의 중심인 툴루즈는 로켓,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금융 및 바이오 산업의 중심지인 리옹은 사자, 알프스 지역의 중심이자 에너지 및 전자 산업의 허브인 그르노블은 산양 모양의 종이접기를 각각 상징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각 지역의 기술과 산업뿐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의미까지 담아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되 큰 그림에서 ‘라 프렌치 테크’의 일관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예술의 나라답다.
‘이게 뭐야, 그냥 브랜드 로고일 뿐이잖아? 이게 무슨 실체가 있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프랑스는 명품 산업의 중심지로서 딱히 실체를 가늠하기 힘든 무형의 자산을 브랜드화 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음을 상기하자.
무엇보다 이 붉은 종이 수탉은 예술의 나라, 와인의 나라, 그리고 노동운동과 휴가의 나라 프랑스의 대내외적 이미지를 혁신의 나라, ‘스타트업 네이션’으로 탈바꿈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가령 세계 최대의 전자 기술 쇼케이스인 미국의 CES에 프랑스는 매번 많은 스타트업을 참가시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런 대규모 컨퍼런스에 참가하는 수백 수천 개의 기업 사이에서, 그것도 스타트업이 관람객들에 인상을 각인시키고 비즈니스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프랑스 스타트업들은 규모에 상관없이 붉은 종이 수탉을 내세우며 관람객들과 잠재 고객, 비즈니스 파트너를 불러 세우고 있다.
‘라 프렌치 테크’의 붉은 수탉의 성공에 힘입은 프랑스 정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7년부터는 이웃 나라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는 프랑스 제조업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파란 수탉 모양의 종이접기를 로고로 한 ‘라 프렌치 팹’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라 프렌치 팹’은 제조업이 프랑스 GDP의 10%를 차지하며 21만 개의 크고 작은 기업을 통해 280만 명의 고용을 창출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미래 전략 산업으로 전환하고 육성하기 위한 전략을 내놓고 있다. 앞서 태어난 붉은 종이 수탉과 마찬가지로 파란 종이 수탉은 전통적인 제조업 위주의 행사장(가령 세계 최대의 제조업 행사인 독일의 하노버 메세 등)과 현장을 누비며 프랑스 제조업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스타트업과 중소·대기업이 각자 비용을 들여 혹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 같은 행사에 참여하고 규모에서도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처럼 일관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주고 있지는 의문이다.
프랑스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앞선 문화적 자산과 국가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첨단 과학 기술의 전면에 이런 문화적 코드를 내세워 효율적으로 마케팅하는 능력 또한 비교 대상을 찾을 수 없을 만치 탁월하다.
하지만 한국도 21세기에 들어 경제적, 문화적으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며 착실히 문화적 자산을 축적해왔고 이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도 높이 인정받는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기술적 우위와 문화적 코드를 결합한 강렬하고도 효율적인 스타트업 지원 정책을 기대해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가시적인 자금 지원과 간섭 말고도 정부가 스타트업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많다. 2013년 이후 몇 번의 변천 과정을 거친 ‘라 프렌치 테크’에서 프랑스 정부가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키는 철학은 “정부는 이끌지 않는다, 지원할 뿐이다”이다.
※ [유럽스타트업열전]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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