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5월부터 전국에서 열리는 세미나를 돌아다녔어요. 그러면서 33개의 투자사를 만났는데 (제 아이템을) 관심 있게 보는 투자사가 많이 없더라고요. 더 열심히 안 돌아다닌 탓일까요?”
교통사고로 마비가 와 몇 년간의 재활을 겪은 후에서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정도가 됐다는 A 씨. 그는 재활센터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재활 의료기기 사업을 힘차게 계획했지만 얼마 전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이템은 정말 좋다고 확신하는데, 의료인이나 전문가가 아니라서 투자사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산균을 이용해 바이오 의약품을 개발 중인 스타트업 대표 B 씨 역시 “투자사에 사업계획서를 보냈는데 투자는커녕 읽고서 피드백도 받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같은 사례처럼 최근 바이오·제약·의료 분야 스타트업은 투자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이들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VC(벤처캐피털)와 액셀러레이터 등 투자사 역시 나름대로 고충을 겪고 있다는 후문이다. 최근 신라젠의 ‘펙사벡 임상 중단’,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 사태’, 엘러간의 ‘가슴 보형물 부작용 사태’ 등 바이오나 의료 업계의 뜨거운 이슈들이 스타트업과 투자사 간 갈등을 키우는 요소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 바이오 잇단 악재에 투자사들 ‘보수적’
흔히 투자 유치는 스타트업 성장에 필수 관문으로 여겨진다. 특히 초기 자금이 많이 필요한 바이오·제약·의료 분야는 더욱 그렇다. 그래야 임상시험을 할 환경이 충분히 조성되고 상용화 발판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직접 시판이 아닌 기술 수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라도 투자사의 도움을 받으면 국내외 제약사와 협업할 기회도 늘어난다. 투자사들 역시 해당 기업이 잘 성장해야 이익이 커지므로 최대한 전략적으로 움직인다.
창업 초기부터 투자를 받으려 안간힘을 쓰는 스타트업과 투자사들의 생각은 얼추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최근에는 초기부터 기업을 선정해 가치를 높여나가는 게 투자사들 사이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그렇게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초기 투자 유치 경쟁에 불이 붙는다. 국내 한 VC 관계자는 “초기부터 기업을 전략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아예 처음부터 판매 채널을 가진 제약사와 공동연구를 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얼핏 보면 처음부터 투자받기를 원하는 스타트업과 이들에 투자해 수익을 내고 싶은 투자사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투자사가 투자를 할 수 있는 기업 수에 ‘제한’이 있다는 데서 갈등이 생긴다. 바이오 헬스케어 기업 전문 액셀러레이터에 따르면 이들이 1년에 투자 가능한 기업은 10~15곳이다. 바이오 스타트업을 전문으로 하는 투자사가 아니면 바이오나 의료 분야 스타트업에 할당된 투자 규모는 더욱 줄어든다. 벤처캐피털 역시 출자자(LP)로부터 받은 펀드를 키워 수익률을 내야 하므로 똘똘한 스타트업 몇 개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특히 바이오와 제약, 의료 분야에서의 논란이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면서 투자사들은 좀 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관계자는 “투자를 받고 싶은 바이오 스타트업은 많은데 투자사들이 오히려 투자하기를 꺼린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 초기 투자 유치 경쟁은 ‘활발’, 해외 시장 진출 경쟁은?
그러다 보니 몇몇 스타트업 대표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나오기도 한다. 앞서의 B 씨가 대표적인 사례다. 충분히 잠재력이 있는 아이템인데 왜 투자를 안 해주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투자사들도 할 말이 있다. 앞서의 VC 관계자는 “워낙 비슷한 아이템이 많아서 확신이 없는 회사에는 투자하기가 어렵다. 상품이나 기술의 가치가 얼마나 오를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자금 조달을 하지 못하면 바이오 스타트업은 성장에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임상 과정을 통과하기가 다른 분야보다는 훨씬 까다로운데 그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원하는 창업프로그램이 있지만 투자사의 도움을 받은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은 전략적인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기술이 있어도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는 가능성도 있다.
해외 시장 진출이 아닌 초기 자본금 마련 경쟁에만 몰리는 구도를 안타깝게 보는 시선도 있다. 회계법인과 투자사들 사이에서 “인구가 적은 국내보다는 수익이 많이 날 수 있는 해외를 노려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경쟁이 부족한 것 같다”든지 “스타트업이 투자사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투자만 잘 받으면 모든 게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좀 더 멀리 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이를 두고 코리아스타트업포럼 관계자는 “아이템이 좋은 바이오나 헬스케어 기업들이 상당히 있지만 높은 규제 장벽 때문에 투자사들이 투자에 주춤한다. 규제를 완화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외부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기업은 사실 제품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직시할 필요도 있다. 또 정부가 앞으로 유망한 기업에 투자를 더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정부 주도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행사를 많이 열고, 인보사 사태 등을 빨리 해결해 위축된 바이오 업계를 살리는 게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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