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뭐 타는 냄새 안 나요? 내 마음이 지금 불타고 있잖아요.”
딱 두 문장이었다. 드라마 ‘불새’를 보던 2004년의 시청자들은 저 두 문장을 듣고는 괴성을 지르며 자지러지거나 혹은 오그라든 손가락을 펴려고 애를 썼고, 대사를 읊었던 에릭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타는 냄새’의 1인자로 대우받고(?) 있다. 불세출의 명대사를 탄생시킨 ‘불새’는 과연 어떤 드라마인가.
시작은 이은주였다. 지금 보면 ‘불새’가 남긴 건 저 명대사밖에 없는 것 같지만, 이 드라마는 이듬해 세상을 뜬 고 이은주의 마지막 드라마 작품(유작은 그해 가을 개봉한 영화 ‘주홍글씨’)이기도 하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이은주는 ‘불새’에서 철없는 오렌지족 아가씨에서 집안의 몰락을 겪으며 삶을 살아가는 30대 이혼녀로의 변화를 안정적인 연기로 선보였다. 거기에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의 ‘다모’로 빵 뜬 이서진, 보이그룹 신화의 리더 에릭, 빼어난 외모와 다부진 연기를 보인 정혜영이 가세하며 ‘불새’는 높은 시청률로 화려하게 비상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 곱씹어볼수록 엽기적이다. 음주가무에 바빴던 청춘이었던지라 짬짬이 챙겨봤는데, 그때마다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최근 들어 다시 집중모드로 시청했는데, ‘어라, 이 드라마 이렇게 선을 넘었었나? 심의에 걸리지 않고 방영할 수 있었던 거야?’ 할 정도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26부작(후속 드라마 사정으로 2회 연장했다) 드라마 속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스토킹, 자해, 방화, 납치, 총기사고, 자살까지 총천연색 막장의 사건사고가 발생한다.
‘불새’는 대학생 시절 가난한 고학생이던 장세훈(이서진)과 천방지축 부잣집 딸 이지은(이은주)이 눈이 맞아 무작정 아이를 갖고 결혼했다가 아이의 유산과 집안의 반대, 환경의 차이 등으로 헤어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은네 집안으로부터 학대에 가까운 무례를 겪은 세훈은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세훈을 붙잡으려는 지은을 말리다 지은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지은네 집안은 몰락. 10년이 지나, 성공한 세훈은 한국에 돌아와 리빙 헬퍼(가사도우미를 비롯한 각종 영역의 서비스 도우미)가 된 지은과 만나게 된다.
아직 감정이 남은 채 헤어진 주인공 남녀의 처지가 뒤바뀌어 다시 만난다는 것은 재미날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그들의 곁에는 각자 그들을 원하는 연인이 붙어 있기 마련이고. 세훈의 곁에는 얄궂게도 지은의 친구인 윤미란(정혜영)이 약혼녀로 붙어 있다. 미란은 세훈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 불구가 된 처지라 세훈에 대한 집착이 어마어마하다. 지은에게 적극 대시 중인 서정민(에릭)의 존재 또한 얄궂은데, 세훈이 CEO로 스카우트된 서린그룹 서문수 회장(박근형)의 아들이기 때문.
꼬이고 꼬인 네 남녀가 빚어내는 파국의 애정 스토리는 모욕과 귀싸대기, 무릎 꿇기 등의 양념을 얹으며 점점 산으로 가고, 앞서 말한 막장의 사건사고를 일으킨다. 막장으로 단련된 한국 드라마에서 이쯤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막장이 보다 입체적이었던 건 ‘광기 어린 클레오파트라’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정혜영의 섬뜩한 연기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지은이 세훈의 전 부인이란 걸 알아채고 벌이는 각종 자해는 공영방송에서 이런 장면도 나올 수 있나 싶을 만큼 끔찍했다. 휠체어에서 구르는 건 기본, 온 집안의 물건을 내던지고 깨부수는 건 다반사였다. 심지어 우연한 감전사고로 다리의 감각이 돌아온 이후에도 세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불구 행세를 하는가 하면, 깨진 유리 파편을 밟고 손목을 긋고 심지어 같이 죽자며 세훈이 있는 창고에 불도 지르고 엽총을 쏘기도 한다. 예쁘장한 얼굴에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키는 가지런한 앞머리를 하고 광기 어린 행동을 불사하는 미란 때문에 ‘불새’는 끝없이 엽기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갑자기 2회가 연장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산으로 가던 스토리는 지은을 오매불망 사랑하던 정민을 납치범으로 만들기에 이른다(정민 아버지의 악행이 담긴 녹음기를 뺏고자). 물론 막장 스토리를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력으로 ‘하드캐리’하며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으로 남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러기에는 대본의 뒷심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졌다.
‘불새’로 남자 주인공 찜 쪄먹는 인기를 얻으며 톱스타로 부상한 에릭 또한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요? (급뽀뽀 후) 방심해서” “이 여자는 내 하느님입니다” 같은 여러 명대사를 날리고, 클라리넷까지 부는 등 ‘열일’ 했지만 뒷심 떨어진 대본을 추어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불새’는 에릭에게 인기와 훗날의 흑역사라는 양날의 검을 선사하며 두고두고 에릭을 놀려먹는 교본으로 자리잡았지.
뒤돌아보면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인들은 엽기적일 만큼 격정적인 드라마를 사랑했던 것 같다. ‘불새’가 방영됐던 2004년에도 ‘천국의 계단’ ‘발리에서 생긴 일’ ‘파리의 연인’ ‘미안하다, 사랑한다’ 같은 드라마가 인기를 얻었으니까. 현실에서는 도무지 혀가 움직일 법하지 않는 느끼하고도 절절한 말을 내뱉고, 결국 누구 하나 죽거나 혹은 남녀 모두가 죽는 비운의 결말을 맺는 드라마들(‘파리의 연인’의 엔딩은 예외지만 그건 그것대로 강렬한 후폭풍이 있었다). ‘불새’도 돌고 돌아 세훈과 지은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미란의 강렬한 죽음 때문에 그들의 엔딩이 참으로 힘겨웠다.
격정의 2000년대는 지났고, 훗날 2010년대 드라마는 어떻게 평가될까 궁금하다. 30대 후반이 되어 본 ‘불새’가 놀라울 만큼 엽기적이었던 것처럼 지금 재미나게 보는 드라마들도 40, 50대가 되어 보면 실소와 장탄식이 터져 나오려나?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올드라마]
'토지', 명작의 리메이크는 계속되어야 한다
· [올드라마]
엉성한 악역이 착한 주인공보다 매력적인 '진실'
· [올드라마]
광복절에 다시 보는 식민지 조선의 청춘들 '경성스캔들'
· [올드라마]
최강 폭염보다 무서웠던 심은하의 초록눈 'M'
· [올드라마]
무심결에 "나 때는 말이야~" 튀어나올 법한 '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