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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토지', 명작의 리메이크는 계속되어야 한다

광복 60주년 2004년에 SBS가 네 번째 영상화…원작 팬 흡족 못해도 완간 버전에 '의의'

2019.08.28(Wed) 15:06:51

[비즈한국] 중학생 때였나, 드물게 아빠가 등교를 시켜주던 날이었다. 항상 바쁜 아빠가 어색해 딱히 나눌 말이 없다가 문득 자랑 겸 내뱉은 말이 “저, 최근에 ‘토지’ 완독했어요”였다. 그때 어이없어 하던 아빠의 표정이 선연히 기억난다(손담비의 ‘니가?’ 표정과 비슷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는 중학생이 쉽게 완독이란 말을 내뱉을 만한 내용과 분량이 아니니까. 그때 완독이랍시고 16권(솔출판사 기준)을 다 읽었다고 자랑스레 내뱉은 중학생의 나도 사실 어려운 내용은 죄 설렁설렁 건너뛰고 좋아하는 인물의 스토리라인을 따라 읽은 것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토지’를 읽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완독을 했는가 자문하면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토지’는 나의 ‘최애’ 소설인지라 SBS에서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제작되어 2004년 말부터 2005년 5월까지 방영한 드라마 ‘토지’ 또한 필수 시청 드라마였다. 사실 ‘토지’의 영상화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구한말인 1897년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달하는 시간과 600여 명의 인물을 집약적으로 담아낸 드라마 ‘토지’​. 그중 실질적 주인공은 최참판댁 여식 최서희와 그와 결혼하는 김길상을 주축으로 이어진다. 사진=SBS 홈페이지

 

1974년 김수용 감독이 연출하고 김지미, 이순재, 허장강, 도금봉, 김희라 등의 배우가 출연한 영화를 시작으로(이 영화 버전은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KBS에서 1979년과 1987년에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니 2004년 버전은 영화와 드라마 통틀어 네 번째 영상화 버전이다. 1987년 버전 드라마는 어릴 때라 아렴풋이 몇몇 장면만 기억나고, 실질적으로 내가 감상한 첫 ‘토지’의 영상물은 2004년 버전 드라마인 셈이다. 

 

원작이 존재하는 영상물은 필연적으로 배역들의 싱크로율과 얼마나 원작을 잘 구현해냈는지를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데, 심지어 박경리 작가의 ‘토지’는 더 말해 무엇하랴. 2004년 버전에서도 ‘나의 서희(길상, 용이, 두수 등 누구에 대입해도 무방)는 이렇지 않아!’라는 원작 팬들의 원성과 불평이 존재했다. 나 또한 꿍얼꿍얼 그 입방아에 한몫 보탰다.

 

청소년기의 봉순(함은정), 서희(신세경), 길상(김지훈)과 용정으로 탈출하기 직전의 성인 버전 길상(유준상)과 서희(김현주), 월선(김혜선), 상현(정찬). 신세경에서 김현주로 인물이 바뀌면서 시청자 사이에서 “나의 서희는 이렇지 않아!”​라는 볼멘소리도 다수 존재했다. 사진=SBS 홈페이지

 

실질적인 주연인 최서희 역할을 맡은 김현주도 애를 썼을 테고 나름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내 상상 속 서희에는 못 미쳤다. 나의 서희는 기품 있으면서도 압도적이고 서릿발 같은 위엄이 서려 있어야 하는데! 서희의 재산을 송두리째 가로채는 악역 조준구 역의 김갑수에는 만족했지만 서희의 남편 김길상 역의 유준상은 볼 때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했다.

 

서희가 속한 최참판 일가만큼 중요한 농부 이용 일가의 이용을 맡은 박상원도 그만하면 괜찮다 싶으면서도 소설 속 ‘풍채 좋은’ 느낌보다 못한 것 같아 아쉬웠고. 하긴 나 말고도 이런저런 훈수를 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 배우들의 고충 또한 컸겠지만. 

 

‘토지’​에는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월선과 용이(박상원)는 첫정이었으나 월선이 무당의 딸이란 이유로 혼인에 이르지 못하며 평생 안타까운 사랑을 이어가야 했다. 반면 서희와 길상은 양반과 종이라는 신분 차이가 있었으나 용정으로 이주하며 극적으로 혼인하게 된다. 사진=SBS 홈페이지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6년간 집필한 박경리 작가의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에 이르기까지 반세기에 이르는 시대를 다루는 데다 등장인물만 600여 명에 달하는 대하소설인지라 고작 52부작의 드라마에 담아내기란 태부족이다. 큰 줄기는 최참판댁 서희의 성장과 성공, 복수를 따라가지만 의병과 독립운동, 신분제도 철폐 후 관습과의 갈등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수두룩하다. 제한된 분량 안에 핵심을 놓치지 않아야 하기에 배우뿐 아니라 각색을 맡은 작가진과 제작진 또한 고충이 많았을 것이다.

 

그 고충을 일견 이해하면서도 나는 2004년 버전 ‘토지’가 실망스러웠다. 특히 선악의 갈등을 극대화하기 위해 김두수를 전면에 내세운 점이 못내 아쉬웠다. 서희의 아버지 최치수를 죽음에 몰아넣은 김평산의 아들이자 훗날 회령 순사부장과 밀정으로 활약하는 김두수는 원작에서도 존재감 확실한 악인이었지만 서희와 길상의 앞에 전면으로 나서는 악인은 아니었는데, 드라마는 효과적인 몰입을 위해서인지 김두수가 용정대화재의 진범이자 끝까지 서희와 대립하는 악역으로 만들었다.

 

조준구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핍박당하는 서희를 돕던 평사리 인물들. 왼쪽부터 꼬장꼬장한 김훈장(이순재), 자유로운 영혼의 윤보(서희승), 풍채 좋고 고결한 성품의 이용, 훗날 서희와 결혼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길상, 용이와 함께 평사리 농부를 대표하는 영팔(박용수)이다. 사진=SBS 홈페이지

 

전형적인 드라마의 갈등구조를 만드는 데는 좋았을지 몰라도 억지스러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훈장과 금녀의 죽음의 방식 등 원작 훼손이라 할 만큼 다른 전개, 원작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활약하는 김환처럼 주변부 인물을 그리는 방식도 마찬가지였고.

 

원작 ‘토지’에서 큰 줄기줄기가 대중의 입맛을 당기는 통속적인 부분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서희의 할머니인 윤씨부인이 겁탈당해 낳은 김환, 서희의 어머니 별당아씨와 도망친 김환, 이용을 둘러싼 세 여자의 에피소드 등) 그 통속성을 넘어서는 깊이가 있었고 한 가지 속성으로 표현하기 힘든 인간의 다면성을 여러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감정이 존재했는데, 드라마는 너무 드라마를 위한 색깔만을 뽑아내어 흔한 통속 드라마 같은 느낌을 줬다. 하긴 애초에 52부작이란 분량이 너무 짧은 거지. 적어도 ‘용의 눈물’처럼 159부작 정도 되어야 어느 정도 ‘토지’를 실감나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었을 텐데.

 

최참판네 재산을 탐내 서희의 아버지를 죽음에 몰아넣는 귀녀(조안)와 그에 동조한 칠성(배도환), 고아가 된 서희의 재산을 송두리째 가로채는 탐욕스러운 홍씨(도지원)와 조준구(김갑수) 부부, 서희의 아버지를 죽이는 김평산과 그 뒤를 이어 서희를 괴롭히는 아들 김두수(유해진) 등이 ‘토지’의 대표적 악역이다. 귀기 어린 연기로 귀녀를 소화해낸 조안과 허술하면서도 욕심 많은 홍씨와 조준구를 연기한 도지원과 조준구, 그리고 생애 처음 드라마에 등장한 유해진이 호평받았다. 사진=SBS 홈페이지

 

이렇게 이야기하면 2004년 버전 드라마에 불평 불만만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한 회도 놓치지 않고 시청한 건 어쨌든 소설 ‘토지’를 영상으로 구현한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자체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원작 팬들이야 어떻게 구현하든 영상물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거고(‘왕좌의 게임’을 보라), 그 어마어마한 내용을 어찌 되었든 완간 버전으로 어느 정도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2004년 버전 드라마에 의의는 있다(이전 버전은 소설 완간 전이어서 일정 부분만 담아냈다). 

 

다만 소박한 소원이 있다면 ‘토지’가 ‘장희빈’처럼 꾸준히 시대에 따라 리메이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훗날 여러 버전의 드라마를 비교 감상하고, 어느 버전의 서희가 가장 어울렸는가 토론도 할 수 있을 거고, ‘토지’가 담아내는 의의를 좀 더 제대로 구현해내는 버전이 등장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니 방송국들이여, 제발 ‘토지’ 좀 제작해다오. 내년이 광복 75주년인데 시기도 퍽 좋지 않나. 아, 그리고 1987년 버전의 드라마도 다시 감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장희빈’ 때도 말했지만 후대의 덕후를 위해서라도 아카이빙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토지’​는 최참판가와 더불어 이용의 일가가 큰 축을 이룬다. 용이는 월선과의 사랑을 잇지 못하고 강청댁(김여진)과 결혼하나 자식을 낳지 못해 우여곡절 끝에 임이네(박지영)와의 사이에서 아들 홍이를 낳는다. 박지영 버전의 임이네도 훌륭했으나 1987년의 박원숙 버전 임이네를 칭찬하는 평도 많으니 1987년 버전이 더욱 궁금해진다. 사진=SBS 홈페이지

 

또 하나의 안타까운 인연인 상현과 봉순(이재은). 상현은 서희를 연모했으나 이미 혼인한 몸이었고, 봉순은 길상을 연모하였으나 길상이 서희에게 마음이 있음을 알기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안타까운 인연의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이 양현으로, 훗날 서희의 양녀가 되면서 서희의 차남 윤국과 또 다른 안타까운 인연을 맺는다. 사진=SBS 홈페이지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서희는 조준구와 일제에 빼앗긴 자신의 땅을 되찾고자 용정에서 사업에 매진하며 큰 부자가 되어 결국 평사리로 돌아온다. 땅의 실질적 주인은 최서희지만 시대와 맞물려 평사리는 용이네를 비롯 많은 이들이 그리는 내 고향, 내 땅으로 그려진다. 사진=SBS 홈페이지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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