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최근 몇 년 사이 후끈 달아오른 프랑스 스타트업계의 중심에 서 있는 아이콘 중 하나는 파리 13구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캠퍼스인 ‘스테이션 F’이다. 이곳은 프랑스 스타트업계의 대부 자비에르 니얼(Xavier Niel)이 사재 2억 5000만 유로(3300억 원)를 털어 2017년에 설립했다. 니얼은 프랑스 2위 인터넷 사업자이자 3대 이동 통신사인 일리아드(Illiad)의 창업자이자 대주주이다.
스테이션 F에서는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테크 기업들과 로레알 등 프랑스 대기업, 한국의 네이버 등이 지원하는 파트너 프로그램을 포함, 30여 개의 각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1000여 개의 초기 스타트업이 입주해 유니콘의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스테이션 F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소개된 바 있어 여기서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거대한 프로그램을 이끄는 총책임자가 30대 초반의 여성, 그것도 프랑스인이 아닌 이란계 미국인 여성이라는 것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록샌 바자(Roxanne Varza)가 그 주인공이다.
1985년생으로 올해 만 34세인 록샌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팰로앨토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이란 조로아스터교 가문 출신으로, 1979년 이슬람 혁명 직후 종교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해 스탠포드에서 수학하고 실리콘밸리에 정착했다. 어머니가 이란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했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프랑스 문화에 익숙했다.
UCLA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록샌은 2007년 졸업 후 프랑스 국제투자기구(Agence française pour les investissements internationaux: AFII) 캘리포니아 지사에서 일하며 실리콘밸리에 투자하려는 유럽 자본이나 유럽에 진출하려는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도왔다. 더 본격적으로 프랑스를 공부하기 위해 2009년에 도불,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Paris)과 런던 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에서 복수 과정을 밟으며 국제경제 학위를 받았다.
록샌은 파리에서 몇몇 스타트업들의 커뮤니케이션과 마케팅 업무를 돕는 한편 자신이 관찰한 파리의 테크 업계에 관한 인사이트를 담아 영어 블로그 ‘테크바게트(TechBaguette)’를 운영했다. 조금씩 명성을 쌓아 나가다가 미국의 스타트업·테크 전문 매체인 ‘테크크런치(techcrunch)’에 발탁되어 프랑스 편집장을 맡게 된다. 한편 테크 업계의 심각한 남성 편중 현상에 문제를 제기하며 뜻을 같이 하는 유럽의 젊은 여성 테크 리더들과 ‘Girls in Tech Paris’와 ‘Girls in Tech London’ 창립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12년부터는 마이크로소프트 프랑스에 합류해 스타트업 관련 프로그램을 주도한다. 스타트업들에게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들을 3년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인 ‘비즈스파크(BizSpark)’에 이어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 CVC)인 ‘마이크로소프트 벤처스’의 프랑스 활동을 연이어 주도하게 되었다.
그녀가 스테이션 F의 설립자 자비에르 니엘의 연락을 받은 것은 갓 서른을 넘긴 2015년이었다. 동경하는 거물 창업가이기는 하나 개인적인 친분은 없던 터였다. 의아해하던 록샌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니엘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내가 원하는 건 유럽, 아니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캠퍼스를 만드는 거예요. 파리 13구에 있는 오래된 거대한 철도 역사를 매입했는데, 이 안에 1000개의 스타트업을 데려다 놓고 육성하고 싶어요. 이걸 당신이 알아서 좀 이끌어줬으면 좋겠어요.”
당시로서는 황당하리만치 원대했던 이 계획을 이끌어 갈 책임을 맡게 된다는 것은 스타트업계에 뜻을 둔 개인으로서 인생에 다시없을 큰 기회이기는 했지만, 팀도 없고 직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없었다. 모든 것을 맨땅에 헤딩해가며 하나하나 일구어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가능한 많은 창업자들을 만나 그들의 조언을 듣고, 런던의 구글 캠퍼스, 베를린의 더 팩토리, 실리콘밸리의 박스닷컴 본사 등을 방문하면서 니엘이 막연하게 구상한 스타트업 캠퍼스의 비전을 구체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연쇄 창업자인 남편의 조언이 주효했다고 한다. 록샌의 남편은 중국계 미국인 닝리(Ning Li). 프랑스 명문 상경계 그랑제콜인 파리고등경영대학(HEC Paris)을 졸업하자마자 이벤트 판매 사이트인 MyFab을 창업해 2009년에 PPR그룹(구찌, 입생로랑, 발렌시아가 등 보유)에 성공적으로 매각했다. 그 뒤 런던에서 중·고급 디자이너 가구를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made.com을 창업, 현재 13개국에서 500여 명의 직원과 함께 2억 유로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2018년에는 지속가능한 화장품 판매를 추구하는 Typology를 창업하여 키워 나가고 있다.
닝리는 록샌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당신이 만나게 될 사람들은 3가지 타입 중 하나일 거야. 첫째 토끼. 이들은 시키는 일만 해내지. 둘째 미친 개.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통제 불능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해. 셋째 사냥개. 이들은 리더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걸 반드시 해내. 사냥개를 알아보고 그들을 고용해.”
또 다른 조언은 검색 기술 스타트업인 알골리아(Algolia)의 창업자 줄리앙 르모앙에게 얻었다. 2014년 실리콘밸리의 Y 컴비네이터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르모앙은, 본인 스스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의 수혜를 입었으면서도 록샌과 니엘의 계획에 부정적이었다. “나라면 절대로 그 캠퍼스에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현재 우리 직원이 60명인데, 우리랑 비슷한 1000개의 스타트업에 둘러싸여 인재를 놓고 경쟁하고 짓은 하고 싶지 않아요.”
르모앙의 일침을 통해 록샌은 대규모 캠퍼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스타트업의 성장 단계가 따로 있음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창업 3년 이하, 직원 15명 이하의 스타트업에 중점을 둔다는 원칙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자비에르 니엘은 왜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고는 하나) 프랑스인도 아닌 젊은 여성에게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맡긴 것일까?
그 자신이 프랑스 테크계의 이단아이자 아웃사이더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비롯한 프랑스인이 갖지 못한 새로운 시각과 다양성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스테이션 F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과정이 그 한 예이다. 니엘이 스타트업 캠퍼스를 입주시키기 위해 매입한 건물은 보르도, 리모주, 툴루즈 등 프랑스 서남부의 주요 도시들과 파리를 연결하는 오스테를리츠 역의 공작창 역할을 백 년 가까이 수행해온, 엄연히 프랑스 정부가 지정한 공식 역사 기념물(Monument historique)이었다.
원래 이름도 ‘알 프레시네(Halle Freyssinet)’였다. 하지만 록샌은 프랑스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 이름을 보자마자 멈칫하게 될 거라고 주장했다. 역사적인 건물의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내부에서도 있었으나 결국 ‘알 프레시네’는 ‘스테이션 F’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록샌은 스테이션 F의 모든 공식 커뮤니케이션은 영어로 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국제적인 스타트업 캠퍼스로서 영어 사용은 필수적이지만, 영어와 프랑스어를 병행 사용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꿋꿋이 이를 관철해낸다. 프랑스 법에 따라 안내 표지와 웹 사이트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어와 영어를 병기하되, 스테이션 F 내에서는 영어 사용이 원칙이다. 덕분에 각국에서 온 3000여 구성원 가운데 3분의 1가량이 프랑스어를 전혀 못하는데도 아무 불편 없이 일하고 있다. 프랑스인을 총괄 디렉터로 삼았다면 이렇게까지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록샌이 관철하고 싶은 다양성은 언어뿐만이 아니다. 테크 스타트업계는 일견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성평등(gender equality) 관점에서는 다른 분야보다 뒤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정치권보다도 못하다. 테크 업계 내에서의 여성의 권위 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또 다른 단체인 영국의 ‘Code First: Girls’에 따르면, 영국 의회 구성원의 30%가 여성인 데 비해 테크 업계 리더층에서 여성의 비율은 5%도 안 된다. 록샌이 테크크런치 프랑스 편집장이던 시절 창립한 ‘Girls in Tech Paris’는 지금은 ‘StartHer’로 이름을 바꾸어 테크 스타트업계에 여성의 참여와 권위 신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스타트업 네이션’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프랑스를 참고하기 위해 스테이션 F를 방문하는 각국의 정치인, 기업인 중에는 록샌을 통역이나 비서 정도로 생각하고 책임자인 중년 남성을 찾다가 놀라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제 출범 2년을 맞는 스테이션 F의 실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되, 존재 자체가 다양성인 이 당찬 여성을 총괄 책임자로 기용한 니엘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유럽스타트업열전] 프랑스 공학도가 '포도농사 로봇'을 만든 이유
·
[유럽스타트업열전] '모빌리티의 미래' 쥔 차량 공유 플랫폼 '뷰로그'
·
[유럽스타트업열전] 버려진 배터리로 '에너지 복지' 꿈꾸는 '랜시'
·
[유럽스타트업열전] 인간의 눈 모방한 AI 머신 비전 '프로페시'
·
[유럽스타트업열전] 자동차업체들이 1조 싸들고 '노스볼트'로 달려간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