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그런 드라마가 왕왕 있다. 소재는 빤하고, 줄거리는 예측 가능하며, 디테일도 엉성한데, 좋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 빤하고 예측 가능하고 엉성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작가의 필력이 있거나 배우들이 ‘하드캐리’하는 경우인데, 2000년 새해 벽두부터 방영한 드라마 ‘진실’도 그 케이스에 속한다.
사각관계, 재벌집 아들과 가난한 집 딸의 사랑은 기본에 상해와 살인교사, 기억상실까지 마치 막장 주말 드라마틱한 클리셰 범벅으로 그해 최악의 드라마 2위에 선정됐지만, 최고 시청률 56.5%의 역대 한국 드라마 시청률 13위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대작이 아닌 16부작 주중 미니시리즈가 거둔 성적이다.
국회의원이자 꽤 큰 규모의 사업체도 갖고 있는 아버지를 둔 딸과 그 국회의원의 운전기사로 일하는 아버지를 둔 딸이 있다. 국회의원의 딸 이신희(박선영)는 대궐 같은 집에, 운전기사의 딸 이자영(최지우)은 그 집 지하에 산다. 반면 학교에서는 둘의 처지가 생판 다르다. 자영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모범생, 신희는 전문대나 갈까 싶을 만큼 공부를 못한다. ‘엄마 친구 아들’ ‘엄마 친구 딸’과 사사건건 비교하기 좋아하는 한국에서 둘의 처지가 비교당하지 않을 리가 없다.
문제는 자영과의 비교로 스트레스 받던 신희가 도를 넘는다는 거다. 학교 시험에서 답을 보여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해 성적을 올리더니 종국엔 자영에게 수능 대리시험을 제안하고, 자영네 오빠가 사고를 치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신희네가 제안한 대리시험을 받아들이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대리시험을 쳐준 덕에 명문대 학생이 된 신희와 재수생 신분이 된 자영. 이미 대리시험을 치는 순간 둘의 관계는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악연이 된 셈이지만 거기에 신희가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던 정현우(류시원)가 우연히 자영을 보고 사랑에 빠지면서 상황은 나빠지고, 현우를 포기하지 못하는 신희가 자영이 국회의원 딸인 줄 알고 사귀었던 옛 남자친구 박승재(손지창)까지 이용해가면서 둘의 사이를 방해하며 관계는 더욱 악화된다. 이 와중에 스토킹, 협박, 납치 같은 온갖 불법행위가 난무하는 건 기본.
신희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받는 자영과 현우. 이쯤에서 결국 신희도 포기할 수밖에 없나 싶지만, 화해를 빌미 삼아 세 사람이 만나 술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난다! 자영과 현우가 죽은 줄 알고 부지불식간 조수석에 있던 자영을 운전석에 앉히면서 신희의 악행은 정점을 찍는다.
그리고 드라마라면 응당 그렇듯 그 장면을 목격하는 이가 생기는데, 그가 바로 신희를 도와 자영과 현우를 괴롭히던 박승재다. 성공하겠다는 야심에 찬 청년인 박승재가 이런 호재를 놓칠 수 없으니, 신희네를 협박하여 회사 마케팅팀 팀장이 되고, 신희의 약혼자 자리까지 꿰찬다.
드라마 제목인 ‘진실’은 주인공 자영이 만인에게 이 모든 진실을 밝혀 나가는 것에 있다. 운전대를 잡아 사고를 낸 것이 자신이 아님을, 현우의 부모에게 자신이 신희가 거짓말한 것처럼 이상하고 못된 여자가 아님을, 모든 죄는 자신의 것을 한 톨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남을 해하고 남의 것을 탐하는 신희와 신희네 가족에게 있음을 밝히는 것. 재미난 건 진실이 밝혀질수록 이 모든 악행의 중심인 신희와 승재 커플에게 시청자의 관심은 더 쏠렸다는 거다.
온갖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죄다 저지르는데, 심지어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도 반성하지 않는 신희와 승재에게 시청자가 더 몰입하게 된 건 왜일까? 이건 아무래도 작가진의 의도가 있었지 않나 의구심이 든다. ‘진실’은 김인영, 소현경 작가가 공동 집필했는데, 김인영 작가는 이후 ‘태양의 여자’에서 여러 번 반성할 기회를 저버리는 악역 신도영(김지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전력이 있고, 소현경 작가 역시 ‘황금빛 내 인생’에서 온갖 막장 클리셰를 딛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었으니 말이다.
원래 교통사고 후 현우가 깨어나지 못하고 죽고 선희네 아버지 이택중(정욱)의 보좌관 최준엽(선우재덕)이 자영과 이어질 계획이었는데, 시청자들의 반발로 스토리가 바뀌어 의도적으로 작가들이 신희-승재 커플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드라마 후반부 중심축은 신희와 승재로 바뀐다.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 도망친 두 사람이 자동차 안에서 키스를 나누며 강을 향해 돌진하는 자살 장면이 얼마나 안쓰럽고 인상적이던지. 그 직후 마지막 장면에서 유학을 떠나는 자영과 현우의 모습이 얄미워 보였을 정도라니까. 사실 신희와 승재에게도 안쓰러운 부분은 있다. 신희는 자영과 사사건건 비교당하며 자영에게 자격지심을 가지며 현우에게 과도하게 집착을 한다.
드라마 말미, 신희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던 자신이 방송 일에 재능이 있었는지 진작 알았으면 그런 과도한 집착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후회하니까, 가난한 집 출신이라 겨우겨우 고학으로 야간대학을 나왔지만 스펙이 딸려 능력을 펼칠 기회조차 원천봉쇄 당하는 승재 또한 자신의 배경이 평균만 되었어도 이렇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다 핑계다. 그들은 자영의 말마따나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보다 더한 악행을 일삼았다. 자영은 여느 드라마의 캔디형 여주인공이었지만 마냥 자격지심에 빠지거나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매사에 똑 부러지고 성실하게 사는 인물이었다. 자영이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자 진실을 추구하는 건 당연하다.
신희를 비롯한 악인들이 벌을 받는 것도 당연하고. 그러나 어쩌랴, 이야기의 흐름은 신희와 승재에게 쏠렸고 진실은 찾았지만 명실상부한 주인공은 바뀌었다. 사연 있는 서브 캐릭터를 좋아하는 나야 ‘진실’이 무척 재미졌지만, 시청자에게 올바른 메시지를 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재밌으니까 오케이?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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