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좋아하는 드라마는 무궁무진하지만 그 중에서도 격하게 애정하는 작품들이 있다. 특히 초호화판 대작과 맞붙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작품들은 한결 애틋하다. 이 좋은 드라마를 왜 몰라줄까,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데, 하는 안타까움이 더해져서다.
‘경성스캔들’도 그렇게 애정하는 드라마 중 하나. 최고 시청률 10%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뒀지만, 내 맘속에는 100%였다고. 최근 주연을 맡았던 강지환의 성폭행 혐의로 재방영은 힘들어 보이지만, 그래도 광복절을 앞둔 이 시기에 이 작품만큼 안성맞춤은 드물다.
2007년 방영한 ‘경성스캔들’은 1930년대 초반,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는 네 명의 청춘을 조명한다. 조국은 일본의 억압으로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긴 암울한 상황이지만 전쟁터에서도 사람은 태어나고 사랑이 싹트듯, 그 시절 경성에도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거리를 활보했고 전근대적인 윤리관에 맞서 자유연애가 움텄다.
주인공 선우완(강지환) 또한 경성의 이름난 모던보이로, 절친한 친구의 밀고로 독립운동 하던 친형을 잃은 아픔을 잊고자 되는 대로 흥청망청 살아가는 중이다. 선우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나여경(한지민).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신념을 이어받아 야학을 운영하면서 비밀 무장 항일단체인 ‘애물단’에 가입하는 여경은 여전히 곱게 땋은 댕기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치마를 고수해 조선의 마지막 여자라는 뜻의 ‘조마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이 대비되는 두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한다. 깐깐하고 신념 있는 여자와 껄렁껄렁 세상을 장난처럼 사는 남자가 얽히는 이유는 로맨틱 코미디에 흔히 등장하는 ‘내기’ 때문이다. ‘위험한 관계’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등 무수히 많은 작품에서 생판 다른 남녀가 내기를 매개로 사랑에 빠진 것처럼, 선우완과 나여경도 내기로 얽매인다.
모던보이 선우완이 ‘조마자’ 나여경을 유혹해 모던걸로 만들겠다는 내기. 여기에 ‘경성스캔들’의 모티프가 된 원작 ‘경성애사’에는 없던 매력적인 인물 이수현(류진)과 차송주(한고은)가 등장한다. 선우완의 형을 밀고하고 배신자가 되어 조선총독부 보안과에 부임 받은 이수현과 명빈관을 관리하는 경성 최고의 기생 차송주는 초반 도무지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인물로 나오지만 완과 여경 사이를 촘촘히 메우며 이야기를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양극의 남녀가 만난다면 종국에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물들기 십상. 우리도 결국 완이 여경에게 물들어 독립투사가 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 초반 정체성 모호하던 수현과 송주도 알고 보니 애물단 사람들이었으니까.
암울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독립운동을 소재로 삼지만 ‘경성스캔들’은 마냥 비장하거나 무겁지 않다. 우선 애물단은 일본 수뇌부와 일제 앞잡이들을 암살하는 비밀 무장 항일단체임에도 결의를 위해서라면 손가락쯤 눈썹 까딱 않고 잘라내는 기존의 독립투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애국을 넘어 만물을 사랑하는 단체’라는 본래의 뜻이 있지만 우스갯소리로 ‘애국은 물론 해야 하며 단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뜻으로 부를 정도니까.
행동대장 격인 송주나 추근덕(장태성)은 눈 깜짝할 새 일제 앞잡이를 암살하면서도 겉으로는 능글맞은 여유가 넘치고, 후반부 애물단에 가입하는 잡지사 ‘지라시’ 멤버인 김탁구(강남길), 신세기(허정민), 왕골(고명환) 삼총사는 시종일관 허당기가 넘치는 개그 캐릭터들이다.
독립운동 한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어딘가 허술하고 순진해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대의를 위한다며 그것에 매몰돼 그 외의 모든 것을 등한시하는 자세보다는 훨씬 행복해 보이긴 한다. 드라마 속 수현의 대사 “위험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세요. 그게 혁명입니다”처럼 말이다.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이 매력 넘치는 캐릭터들이지만, 유독 눈에 띄는 건 수현과 송주다. 밀고자, 배신자의 누명을 쓴 채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고 언더커버(undercover)로 활약하는 수현은 짠하고, 그런 그의 정체를 모를 때나 알고 나서나 맘껏 사랑하지 못하는 송주의 안쓰러운 사랑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선하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종로경찰서 순사부장이던 이강구(윤기원). 가난으로 여동생을 잃은 아픔이 비뚤어져 악랄한 형사로 변해 조선인들을 괴롭히던 이강구에게도 드라마는 시대가 빚어낸 괴물이라는 냉정한 시선과 함께 일말의 연민을 담아낸다. 개인적으로, 만약 내가 일제강점기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모진 고문과 압박을 이겨내며 과감히 독립운동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있기 때문에(존경합니다, 독립투사님들) 더욱 그를 단순히 나쁜 놈으로만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 불매 운동이 거세지는 요즘, 자유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들을 그린 ‘경성스캔들’은 12년이 지났어도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드라마 마지막, 흘러나온 자막은 후손인 우리에게 먹먹한 감정마저 안긴다. ‘먼저 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행복하십시오.’
일본 불매 운동과 한일 양국의 정세에 대해 갑론을박이 적지 않다. 무조건적인 배척이 도리어 ‘제 살 깎아먹기’라는 반응도 있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혐오와 배척이 아니라면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행동의 일환으로 지지한다.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한다’는 어느 네티즌의 말처럼, 다시는 이 땅에서 자유로운 연애, 자유로운 경제활동, 그 모든 자유를 억압받고 싶지 않으니까.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로,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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