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0년 전, 결혼하자마자 정기적금 하나를 들었다. 신혼의 재테크가 아니라, 오로지 ‘결혼 10주년 크루즈여행의 꿈’을 위해서였다. 살다 보니 결혼 10주년이 뭐 그리 대단한 기념일도 아닌 것을, 그때는 10년 뒤라는 먼 미래를 장밋빛으로 채워줄 씨앗 하나 심는 심정이었다.
아니면 그저 꿈이라도 꾸는 행복함을 누리기 위해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음을 알면서도 실행한 상징적 행동이었거나. 그때 난 이미 10년 뒤에도 크루즈여행을 가기는 어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10년 뒤를 꿈꾸며 12년짜리 만기 상품을 가입했을 리가!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만기가 돌아오지 않은 적금은 용도가 변경된 지 오래고, 우리의 크루즈여행도 ‘그땐 그런 꿈을 꾸었지’ 정도로 지나갈 뻔했다. 삶은 예측불가라서 스릴 넘치고 짜릿한 걸까. 한낱 꿈으로 끝났을, 그랬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을 우리의 ‘결혼 10주년 크루즈여행’이 유럽에 살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실현돼버렸다.
고백하자면 유럽에 살기 시작할 때조차 크루즈여행은 버킷리스트에 없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크루즈를 여행의 ‘끝판왕’, 평생의 꿈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편승했던 것일 뿐, 대부분을 배 안에서 보내는 성격의 여행은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다. 그 배의 규모가 어마 어마해서 ‘바다 위 리조트’라 불린다 할지라도.
그런데 주변의 한국인들은 하나 같이 크루즈여행을 추천했다. 1년에 세 번이나 크루즈여행을 다녀온 가족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크루즈를 사랑했다. 허나 여행은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 아닌가. 배 안에 온갖 엔터테인먼트가 다 있다고, 기항지에서 내리지 않아도 배 안에서 즐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짧다고 다들 입을 모을 때도, 우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크루즈는 시간 많고 돈 많은 실버 계층의 전유물쯤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계획했던 것처럼, 결혼 10주년 날짜가 포함된 일정에 맞춰 크루즈여행을 하게 된 건 오로지 목적지가 노르웨이였기 때문이다. 스위스만큼이나 살인적인 물가로 적잖은 경비 지출이 예상되는 터라 숙식 및 일체가 제공되는 크루즈를 타는 것이 합리적인 지출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코틀랜드 하일랜드를 여행하며 이미 운전의 고단함을 경험하니 더 이상 아찔한 운전은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 즈음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자고 쉬는 형태의 여행을 바라기도 했다. 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면서 우리는 베르겐, 올레순, 스타방게르 등 노르웨이 4개 도시를 기항지로 하는 7박 8일 크루즈여행길에 올랐다.
6월 말 시작하는 독일의 공립학교 여름방학에 맞춰 가격이 1.5배 이상 뛰는 까닭에 가격이 착한 6월 초·중순을 택했고, 선사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선사를 골랐다. 우편으로 도착하는 모든 티켓 및 서류, 팸플릿 등이 죄다 독일어로 돼 있고, 크루즈선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이벤트 역시 독일어로 진행된다는 불편함이 없지 않았지만, 최대 장점은 다른 나라로 이동할 필요 없이 기차로 1시간 40분 거리인 함부르크에서 출발한다는 점, 그리고 캐주얼하다는 점이었다.
드레스코드 까다로운 행사가 많고, 제대로 갖춰 입고 입장해야 하는 레스토랑 등이 많다고 알려진 다른 글로벌 크루즈 선사와 달리 독일 선사는 리조트에 머무는 정도로 편안했다. 기껏해야 블랙 앤 화이트 정도의 드레스코드를 요하는 파티 정도가 전부였는데 그나마 아이가 있는 우리가 참여할 일은 없었으니 짐 꾸리는 일도 간단했다.
토요일 오후, 함부르크 중앙역에 내려 선사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항구로 이동해 크루즈를 처음 마주한 느낌은 상상 이상이었다. 13만 톤 규모가 어느 수준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는데, 눈앞에 거대한 빌딩 하나가 서 있는 듯 압도적이었다. 3층부터 18층에 이르는 공간에는 다양한 형태의 객실과 동서양 스타일을 넘나드는 수많은 레스토랑 및 카페, 축구장 및 게임센터 같은 각종 엔터테인먼트 공간, 형태가 다른 두 개 층에 이르는 수영장, 헬스장 및 사우나, 매일 공연이 열리는 3층 높이의 극장, 쇼핑센터, 갤러리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아이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의 작은 도시’였다. 그것도 승선 시 절차를 거쳐 발급받은 개인용 보딩 카드 하나만 있으면 동전 하나 필요 없이 완벽하게 누릴 수 있는 꿈의 도시.
굳이 유료인 레스토랑이나 카페, 바 등을 이용하지 않아도 음식과 음료, 와인에 맥주까지 무료 제공되는 대여섯 개의 레스토랑이면 종일 먹고 마시고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전날 밤 숙소 앞에 배달된 신문을 보며 다음 날 어느 레스토랑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오픈인지, 무료 공연 내용은 무엇인지, 특별 이벤트 등은 어떤 게 열리는지, 기항지 도착과 출발은 언제인지 등을 체크하며 하루 일정을 짜는 것뿐이었다.
아이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겁 많은 아이는 목에 건 보딩 패스 하나 믿고 혼자 축구장에 가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탁구를 치며 노는 등 새로운 여행의 세계를 접하며 한껏 들떴다. 전속 가수들이 나오는 수준 높은 무료 공연을 보며 슬쩍 가수의 꿈도 생겨났고, DJ 댄스파티에선 나도 몰랐던 댄스 실력을 보여줘 옆에 있던 독일 할머니들을 놀라게 했다. 급기야 마지막 날 꼭 다시 크루즈를 타고 싶다며 눈물까지 보여 나를 당황하게 했다.
솔직히 노르웨이 여행과 크루즈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항지에서 주어진 시간은 한정돼 있었고 시간에 맞춰 다니다 보니 도시를 속속들이 체험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보다는 크루즈 내에서 누린 일상들이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는 게 예상치 못한 성과랄까. 노인들이 많을 것이란 편견과 달리 우리 아이 또래의 가족 단위, 청소년 자녀를 동반한 가족들이 훨씬 많았고 남녀노소 모두의 기대를 채우기에 충분한 장치들이 마련돼 있어 24시간 배 안에만 있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다시 크루즈여행을 가겠느냐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충분히 즐거웠지만 한 번의 경험으로 족하다는 심정이랄까. 다만 한국인 가족들이 왜 몇 번씩 크루즈를 타는지는 이해할 것 같다. 크루즈가 언감생심인 두 가지 이유가 비용과 시간의 문제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비용적 측면에서 유럽까지 비행기를 타고 와야 하는 절차가 생략되니 한국에서 1명이 크루즈를 탈 금액으로 잘 하면 온 가족이 탈 수도 있고, 크루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여행의 묘미가 넘쳐나니까.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유럽 생활을 마치기 전, 아이의 바람대로 다시 한 번 크루즈에 오를 수 있을까. 고객으로 등록된 독일 선사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광고 메일이 날라 온다. 4일짜리, 함부르크를 출발해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다녀오는, 결과적으로 온전히 크루즈 내에서의 일상을 즐기는 데 목적을 둔 상품이 눈을 끈다. 창문 없는 객실이 단돈 350유로(약 48만 원). 한국에선 좀 좋은 리조트 1박 금액 아닌가? 다시 드는 생각, 유럽 사람들은 참 좋겠다.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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