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나올 법한 이 키워드가 등장한 곳은 다름 아닌 윤석열 검찰총장(사법연수원 23기) 취임사였다. 윤석열 총장은 지난 25일 취임식에서 “권력기관의 선거개입, 불법자금 수수와 우월적 지위의 남용, 시장을 교란하는 반칙행위 등 공정한 경쟁질서를 무너뜨리는 범죄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철학을 내세웠다.
전국 최대 검찰청의 수장 바통을 이어받은 배성범(사법연수원 23기) 신임 서울중앙지검장 역시 지난 31일 취임 일성으로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범죄와 민생을 해하는 범죄에 눈감지 않는 검찰이 돼야 한다”고 덧붙이며 동기이자 상관인 윤석열 총장의 공정 경쟁질서 확립이라는 철학에 힘을 보탰다.
‘공정한 경쟁, 우월적 지위를 악용한 부당 이득’과 같은 다소 큰 키워드들에 혼돈에 빠진 대기업들. 누가 ‘윤석열호’의 첫 수사 대상이 될지 점치느라 여념이 없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서는 ‘적폐수사 시즌2’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이라는 말은 결국 수사 대상 취사선택을 돌려 얘기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는 곳들이 있다. H 그룹이다. 공사 입찰담합이라는 ‘공정한 경쟁’을 저버린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 검찰 흐름에 밝은 법조인은 “지난 몇 년 동안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 방식과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게 검찰 내 중론이고 대기업의 담합 사건 수사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것은 물론, 검찰의 존재 이유를 청와대 등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설명했다.
검찰총장 취임식과 함께, 대검찰청은 언론에 총장 취임사에 대한 설명자료까지 이례적으로 배포하며 “취임사에 신임총장의 검사 인생과 철학이 반영됐다”고 강조했다.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의 영향으로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시장경제와 공정한 경쟁 모델에도 관심을 표해왔다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윤 총장은 공정경쟁 질서를 무너뜨리는 요인으로 시장교란 반칙행위를 꼽았는데, 대규모 기업담합이나 내부자거래와 같이, 대기업이나 오너 일가의 ‘갑질’로 불려온 불공정거래에 대한 검찰 수사에 힘이 실릴 것이라는 평이 나온 대목이다.
검사장 출신의 한 변호사는 “원래 취임사는 철학을 담는 것이라서 매우 중요한데, 윤 신임 총장 취임사는 검찰의 기초체질 개선보다는, 어떤 수사를 하는 검찰로 나아가겠다는 수사 방향점을 제시한 취임사에 가까웠다”며 “자신이 내뱉은 취임사는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다. 핵심 간부들과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고 설명 자료까지 배포했다면 이를 성과로 만들기 위한 움직임을 곧 보여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윤 총장의 취임사는 결국 적폐수사 ‘시즌2’를 위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수사 대상 선별 선택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 윤 총장은 취임사 등에서 “중소기업의 사소한 불법까지 수사권을 발동할 것인지 아닌지는 비례와 균형 관점에서 헌법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배성범 지검장 역시 “중소기업 등 경제 주체들이 대내외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무거운 죄는 필히 벌하고 가벼운 죄에는 관용을 베푸는 마음을 가져달라”고 서울중앙지검 검사들에게 당부하며 윤 총장의 취임사에 힘을 보탰다.
이에 대해 검사 출신 변호사는 “사기나 배임, 횡령과 같은 경제 범죄는 결국 공정한 경쟁이나 거래를 방해한다고 보면 모두 해당한다”며 “결국 공정 경쟁이라는 키워드는 수사 대상 취사선택을 위한 포장지로 언제든 활용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코오롱생명과학의 인보사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등 주식 상장 과정에서 오너 일가 등 특정인들에게 이익이 집중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기존 사건들 역시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위반했다는 맥락으로 볼 때, 언제든 수사가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최근 서울중앙지검 수사 흐름에 밝은 한 법조인은 “윤석열 총장은 핵심 혐의를 입증하고 수사에 성공하기 위해 피의자의 다른 범죄 혐의도 샅샅이 살펴보는 전형적인 특수통”이라며 “윤 총장이 믿고 수사를 맡기는 특수통 검사들 역시 비슷한 수사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정경쟁 침해’라는 맥락으로 수사 대상이 되면 핵심 혐의 외에도 각종 비리들이 다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차해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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