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의료소송에서 감정이 제일 중요하죠. 법원이 감정을 가장 신뢰하니까요. 그런데 예전에는 감정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3개월 정도였다면 요즈음에는 1년까지 기다려야 해요. 지쳐서 소송을 포기하는 사례도 종종 있어요.”(의사 출신 변호사 A 씨)
감정촉탁기관 수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진 서울중앙지방법원조차 사정이 이렇다. 감정촉탁기관은 법원이 의학적 소견 및 감정을 의뢰하기 위해 지정한 병원이다. 법원은 주로 해당 법원에 감정촉탁기관으로 지정된 병원의 의사에게 의학적 소견을 묻고 이를 토대로 판결을 내린다. 병원이 감정을 거절하면 법원은 또 다른 병원에 감정을 의뢰해야 한다. 따라서 감정촉탁기관으로 지정된 병원 수는 감정에 소요되는 시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비즈한국’이 서울중앙지법에 정보공개를 통해 입수한 ‘2019년 감정인 등재 신청 현황’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에 지정된 감정촉탁기관은 18곳으로 확인됐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의료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의료소송 전담 변호사들은 갈수록 지연되는 감정 탓에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밝혔다. 변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다른 지역의 법원에 등재된 감정촉탁기관은 더 적다.
# 의료사고 건수 늘어나는데 감정촉탁기관 태부족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2018년도 의료분쟁 조정·중재 통계연보’에 따르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의료사고 분쟁 조정 신청 건수는 5162건인데, 서울이 1253건으로 가장 많다. 그만큼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의견이 일치가 안 돼 고충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서울중앙지법은 전국에서 소송이 가장 많이 몰리는 데 비해 감정촉탁기관은 18곳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모든 의료소송에서 감정이 필수는 아니지만, 감정촉탁기관을 지정하는 것은 물론 감정을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감정촉탁기관이 감정을 하는 시간과 관련된 규정이 없기 때문에 각 병원의 사정에 따라 감정 시간이 천차만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가령 입원을 해서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 병원에 환자를 입원시킬 여력이 없으면 감정 시간은 계속 지체된다. 게다가 감정촉탁기관에서 감정을 거절한다고 처벌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감정촉탁병원을 지정하는 과정도 까다롭다.
매년 법원행정처는 국·공립병원과 종합병원장들에게 전문의를 추천받아 ‘감정촉탁병원 및 담당 의사 명단’을 만든다. 이 명단을 받아 각 법원은 권역 내에 있는 병원을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명단을 작성한다. 이후 법원은 재판이 벌어질 때마다 각 법원 명단에 올라와 있는 병원을 무작위로 선정해 감정을 의뢰한다.
권역을 제한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기 때문에 법원은 근처에 있는 ‘공신력’ 있는 병원을 중심으로 감정촉탁병원을 지정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지법에 지정된 감정촉탁기관 18곳 중 서울지법 권역(종로구, 중구, 강남구, 서초구, 관악구, 동작구) 내 병원은 4곳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서울·경기권 내 대학병원 혹은 상급 공공의료기관이었다.
지역에 있는 지방법원의 경우 감정이 훨씬 어렵다. 권역 내에 감정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대학병원이 몇 개 없을뿐더러, 근방으로 넓히더라도 공신력 있는 의료기관이 드물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역 내 몇 개 없는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는 지역 거주민은 해당 병원에서 감정을 받을 수 없어 선택의 폭이 좁다. 아울러 다른 법원 권역에 있는 병원에서 감정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때는 법원에 특별한 이유를 소명해야 하므로 과정이 더욱더 까다롭다. 다른 변호사 B 씨는 “서울중앙지법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감정으로도 의료과실 여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경우 법원의 ‘전문심리위원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전문심리위원은 법원에 상근하며 법원에 적절한 설명이나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이 역시 신청해도 거절을 당하기 일쑤다. 전문 분야 위원들이 없다는 까닭에서다. 결국 감정인을 구하지 못해 의료소송이 지연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해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정신적 피해가 커지고 있다. 법원은 감정촉탁기관 이외에 대한의사협회에 감정을 의뢰하기도 하지만 의사들끼리 알음알음 아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와 변호사들 사이에서 감정이 제대로 이뤄진 것 맞느냐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 감정촉탁기관 수 늘리고 강제성 부여해야
따라서 감정촉탁기관을 일반 종합병원으로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2016년 대법원은 “국·공립병원이나 대학병원 위주였던 감정촉탁기관을 종합병원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변호사 A 씨는 “감정처를 늘리는 것이 감정을 빨리 진행하게끔 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며 “법원은 보수적인 집단이지 않나. 감정 업무를 하지 않은 병원을 신뢰하지 못해서 매년 감정촉탁기관의 명단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감정 의뢰를 받은 병원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다. 현재는 감정촉탁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하더라도 병원이 거절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 변호사 B 씨는 “병원은 감정이 주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안 하겠다고 할 때가 많다. 페널티를 부과하는 게 어떨까 싶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로 구성돼 감정만을 담당하는 ‘제3의 기관’을 설립해, 환자와 의사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운영되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산부인과의원 원장 C 씨는 “감정은 의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책임을 따지자는 것인데, 당시 의료 행위에 가담하지도 않은 다른 의사가 어떻게 그걸 정확히 판단하겠느냐. 변호사들이 수소문해서 유리한 감정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며 “대한의사협회에서 의료감정원을 올해 안에 설립할 예정이다. 하지만 공공기관처럼 운영되게 하려면 정부와 협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김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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