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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판문점너머] 남북미 회동 한 달, 왜 '중재자'만 덤터기 쓰나

한반도 열강 각축 속 남북관계까지 길 잃어…지난 봄 막후접촉 후유증과 북미회담 오판 시각도

2019.07.30(Tue) 00:59:25

[비즈한국] 한반도와 주변 정세가 말 그대로 각축전이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서막을 알린 강대국의 근육질 과시는 일본의 대한(對韓) 경제 보복과 중·러의 한국 영공 침입, 북한의 미사일 도발 등이 뒤엉키면서 한여름 난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의 전통적인 지형도라고 여겨졌던 한·미·일과 북·중·러 대치 구도는 한국과 일본의 외교·무역 갈등이 위기상황으로 치달으면서 요동치고 있다. 한·미·일 삼각동맹의 약한 고리로 드러난 한·일 양축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는 형국이다.

 

가장 어려운 국면에 처한 건 대한민국과 문재인 정부인 듯 보인다. 역내에서 미우나 고우나 든든한 ‘우방’ 역할을 해온 미국과 일본이 미덥지 못한 상대로 탈바꿈하는 징후가 역력하다. 일본 아베 정부는 한국 사법부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에 반발해 반도체 소재와 부품의 수출 제한조치에 이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국가 목록)에서 제외하기 위한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본의 이 같은 움직임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인 듯하다. 게다가 세계무역기구(WTO)에서 한국의 개도국 지위 중단을 요구하는 등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밀어붙일 기세라 한국을 힘겹게 하고 있다.

 

불과 한 달 전인데…. 지난 6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판문점을 방문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있다. 사진=청와대 제공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는 건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속내를 알 수 없는 행보다. 일본과의 무역 갈등에 중·러 공군기의 동해상 합동훈련 전개와 러시아 전폭기의 독도 영공 침범 같은 도전적 상황을 맞은 문재인 정부에 김정은 위원장은 미사일 발사라는 도발카드로 부담을 더하게 만들었다. 위협적 메시지까지 쏟아냈다. 지난 25일 강원도 원산 호도반도에서 사거리 600km 미사일 두 발을 쏘아올린 김 위원장은 “남조선에 엄중한 경고를 보내기 위한 무력시위”라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목하는 ‘남조선 당국자’란 표현까지 동원해 대립각을 세운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꼭 한 달 전 불어닥친 판문점발 훈풍과는 확연한 온도차가 난다. 지난 6월 30일 판문점에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회동이 성사됐다. 시작은 일본 오사카에서 G20 정상회담을 하고 한국으로 출발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비무장지대(DMZ) 전격 상봉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안하면서다. 물론 사전 물밑 조율이 있었을 게 거의 확실시되지만, 외형적으로는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제안을 수용하는 형태로 ‘정상회담에 가까운’ 북·미 정상의 만남이 이뤄졌다. “트럼프 주연의 ‘리얼리티 쇼’처럼 진행된 정상회담 이벤트는 이제 실무회담으로 이어지며 북한 비핵화의 미래를 좌우할 운명의 순간을 예고하고 있다(아산정책연구원 분석보고서)”는 기대감 높은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철저하게 ‘숨은 중재자’를 자처했다. 같은 날 이뤄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은 “오늘 대화의 중심은 미국과 북한”이라고 강조했다. 청와대가 며칠 뒤 트럼프-김정은 회동을 현장에서 사실상 중재하는 정황을 담은 몇 장의 사진을 공개하며 역할을 부각시키려 한 대목도 드러나긴 했지만 절제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뒤 접점을 맞지 못한 북·미 양측의 협상 재개와 비핵화 논의 진전을 위해서는 판문점 회동의 성과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평양과 워싱턴의 관계가 궤도에 다시 오르면 소강상태인 남북 당국대화도 모멘텀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란 게 우리 정부의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런 청와대와 정부 대북부처의 판단은 오판에 가까웠다. 남북관계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전면에 나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고 북측 요구대로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여름 휴양차 머물던 동해안 원산에서 대남 타격용 단거리 미사일 발사를 직접 참관하고 ‘엄중한 경고’ 운운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관영 선전매체나 대남통 인사를 내세워 비방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북한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한국군이 도입한 F-35A 스텔스 전투기의 배치 중단과 8월 초 실시할 예정인 ‘동맹 19-2’ 한·미합동군사연습의 취소를 요구하고 있다. 둘 다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어려운 사안이다. 문 대통령을 퇴로 없는 길로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전면에 나서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하고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강요하는 극한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5일 신형 단거리 탄도미사일의 ‘위력시위사격’을 직접 조직, 지휘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6일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상황이 이런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입장이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김정은의 위협적 언동에 대해서도 “미국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서 전혀 염려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나와 김정은의 관계는 매우 좋다”며 북한의 미사일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투의 말도 했다. 김정은이 한국에 노골적인 도발을 하고 심지어 선제타격을 위협하는 발언을 했는데도 트럼프는 면죄부를 준 셈이다. 내년 대선을 겨냥한 레이스에 사실상 돌입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문제와 비핵화에서의 성과를 표로 몰아가기 위해 대북 이슈 관리에 나선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문제는 한국 정부의 대북 및 대한반도 위기관리 전략에 뾰족한 대응카드가 없다는 점이다. 최근의 국제정세는 문재인 정부를 한반도에서 확실한 우방이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일본과는 무역·외교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익을 최우선 순위로 놓고 아베 정부, 김정은과 거래를 할 태세다. 여기에 한국의 국익이나 한·미 동맹의 가치가 끼어들 틈새는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실종상태인 남북관계의 조속한 복원이 필요해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과의 대화물꼬를 텄다. 지난해 모두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할 정도로 남북 당국대화는 봄날을 맞았다.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호’의 발사를 끝으로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면서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는 국민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보수적 성향으로 북한과 갈등적 요소를 드러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와의 차별화에도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지난 4월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운운하며 비난한 것을 신호탄으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6·​30 판문점 회동 며칠 전 북한이 문 대통령의 북·미 대화 중재 움직임을 비난한 데 이어 이번에 김정은이 미사일 도발과 함께 ‘경고’ 발언을 쏟아내면서 자칫 남북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지난 봄 서훈 국정원장이나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 차원의 남북 간 비공개 막후접촉에서 뭔가 상황이 단단히 꼬인 후유증이란 진단도 나온다. 남북 협의과정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크게 실망하거나 서운해할 상황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감정 섞인 노골적 공세가 나왔다는 얘기다.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6·​30 판문점 북·미 회동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개인적 신뢰’로 포장된 계산법이 맞아떨어져 성사된 이벤트였다. 관계개선과 비핵화 논의를 위한 실무팀 구성에 시간이 걸리는 등 난항도 있지만 적어도 파열음을 내지는 않고 있다. 이에 반해 남북관계는 석연치 않은, 혹은 배경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상 간의 신뢰 관계마저 위협받으며 벼랑 끝에 선 분위기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생각하고, 기회 속에서 위기에 대비하라”는 말은 남북관계를 분석하고 전망해온 베테랑 관측통들이 즐겨 쓰는 금언이다. 한 달 만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한반도 정세와 남북관계는 이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장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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