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참 이상한 일이다.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면, 괴롭고 힘들었던 지난날에서 힘듦은 퇴색되고 아련했던 추억이 더 진하게 남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첫사랑을 못 잊고, 무심결에 ‘나 때는 말이야’ 같은 말을 내뱉나 보다.
20세기 말이었던 2000년 방영한 시대극 ‘꼭지’도 그렇다. 소도시에서 1970년대 중후반이라는 시대의 질곡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송씨네 삼형제의 이야기는, 결코 아름답거나 아련하게 채색될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이상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물론 당시 나는 뭣도 모르고 한껏 그 노스탤지어에 감응했다. 아니, 원빈의 미모에 감응한 건가.
‘꼭지’의 드라마 타이틀롤은 아홉 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외갓집에 살게 된 소녀 꼭지(김희정)지만, 주요 주인공들은 어린 꼭지의 눈으로 관찰한 외갓집 식구들, 그 중에서도 외삼촌 삼형제로 봐야 한다. 그러니까 꼭지는 소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화자(話者) 옥희 같은 역할인 셈이다.
창졸간에 부모를 잃고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큰 외삼촌 송준태(조민기)의 손에 이끌려 평택으로 온 꼭지에게 외가 식구들은 별종처럼 보인다.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둘째 외삼촌 송현태(이종원)는 순경의 입장에서 금은방 강도사건 용의자로 여겨지는 셋째 외삼촌 송명태(원빈)를 쫓고 있는 중이다. 외가에 가보니 딸(꼭지의 엄마)을 잃은 외할머니 김복녀(윤여정)는 슬픔을 못 이겨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는 중이며, 외할아버지 송만호(박근형)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 복녀에게 넌덜머리를 내며 구박하고 있다.
꼭지가 바라보는 외가의 일상은 그야말로 스펙타클이다. 현태와 명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못 잡아먹어 안달인 앙숙 사이고, 복녀 때문에 첫사랑과 결혼하지 못한 한을 평생에 걸쳐 풀어내고 있는 만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호를 놔주지 않는 복녀 역시 마찬가지다. 법 없이도 살 법한 준태와 준태의 아내 혜순(윤유선)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고.
거기에다 현태가 사귀고 있는 김지연(박상아)은 예전 만호가 상전으로 모시던 집안의 딸인지라 두 집안 사이의 갈등도 걸핏하면 일어난다. 여기에 제주 4·3 사건에 휘말려 죽을 뻔했던 만호의 목숨을 구해준 문성자(김영란)와 그의 딸 정희(예지원)이 나타나 만호네 집안을 뒤흔들고, 지연네 집안에 원한을 갖고 있는 조동철(천호진)이 나타나 만호에게 자신의 재산 권리가 적힌 각서를 내놓으라며 집안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50부작 ‘꼭지’에서 갈등은 숱하게 많이 일어나지만, 갈등의 주요 골자는 욕망이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며 옛 상전네 집안 딸 지연과 사귀는 현태의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 조동철의 부친과 동업했으나 부친이 죽자 동철에게 돌아갈 재산의 권리를 차지하고는 동철에게 한(限)을 심어준 지연의 아버지 김중섭 회장(홍성민)의 욕망, 친일 행위로 모은 부친의 재산을 김중섭 회장에게 잃고는 그에게 복수하고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배상란(박지영)도 버리고 국회의원이 되어 김 회장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조동철의 욕망, 정혼자 지연을 잃고 오로지 돈만 추구하며 무고한 명태를 살인자로 몰아가는 장준일(김응석)의 욕망 등이 얽히고설킨다.
이 끝을 모르는 욕망의 소용돌이를 딛고 ‘꼭지’를 노스탤지어 짙은 드라마로 만드는 역할은 그 사이사이 걸쳐 있는 이루어지기 힘든 아련한 사랑과 1970년대의 풍경들이다.
어릴 적 사고로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을 지닌 정희가 현태를 바라보는 앳된 사랑, 애인 지연이 있음에도 정희의 그런 시선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현태의 마음, 자신을 쫓아다니던 명태를 어느덧 사랑하게 된 허지혜(이요원)의 애틋한 첫사랑, 큰형 준태의 친구이자 조동철이 버린 상란을 여자로 바라보며 순정을 다 바치는 명태의 사랑 같은 마음이 ‘꼭지’를 아련하게 만든다. 간식으로 달고나를 사먹고, 토끼풀반지를 만들며 즐거워하는 1970년대의 풍경과 그 모든 광경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내레이션으로 들려주는 꼭지의 음성도 이 드라마를 노스탤지어의 향연으로 이끈다.
드라마는 후반으로 갈수록 비뚤어진 욕망의 대립으로 치닫는다. 국회의원이 되려는 김중섭 회장과 조동철의 갈등은 검사가 된 현태와 동철의 계략으로 살인자 누명을 쓴 명태까지 휘말리며 형제의 끝을 모르는 갈등을 야기한다. 정희를 아내로 맞은 상국(박충선)과 상국의 어머니(김영옥)는 천진난만한 정희를 구박하고 툭하면 정희를 빌미삼아 만호에게 돈을 뜯어내기 일쑤다. 선거에서 이기고자 폭력 자작극을 자행한 동철의 악행은 상란이 죽을 뻔한 위기까지 불러온다.
마구잡이로 엉킨 실타래를 풀어버리는 건 결국 한국 드라마 특유의 권선징악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참아내게 만들던 배우진의 촘촘한 연기와 이경희 작가의 필력은, 마지막에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었는지 무너져 내린다. 욕망을 버리지 못한 김 회장네 집안이 망하고, 조동철이 감옥에 갇히고, 착한 정희를 구박한 상국네도 나름의 벌을 받고, 마지막 순간 동생 명태를 구하고자 몸을 날린 현태를 여덟 살까지의 기억만 남긴 채 기억상실증으로 만들고 나서야 욕망이 멈추니까.
지금 다시 감상하고 나니 배신감에 휩싸이는 책임감 없는 마무리지만, 그래도 그땐 명태를 연기한 원빈의 초롱초롱한 미모를 감상하는 재미로, 상란을 향한 명태의 순정을 응원하는 재미로 견뎠던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기억상실증으로 얻어내는 형제의 평화라니, 너무하지 않나 싶지만.
제주 4·3 사건의 후유증, 유신체제와 국가보안법 등 시대의 아픔을 중간중간 소재로 삼았지만 ‘꼭지’가 그려내는 1970년대는 결국 남는 건 가족뿐,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20~30년 후 2010년대를 배경으로 시대극을 만든다면 어떤 풍경일까. 그때도 ‘우리 때는 말이야’ 하면서 노스탤지어 진하게 담은 드라마가 탄생할까? 그때도 결국 남는 건 가족뿐이라는 결론이 나올까? 내 생각은 ‘글쎄’지만, 과연 어떨지.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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