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의료 소송에서 의사와 환자 모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료가 있다. 바로 ‘진료기록부’다. 환자는 본인이 입은 피해와 의료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해야 한다. 반면 의사는 자신의 행위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 이때 진료기록부는 핵심적인 증거가 된다.
하지만 진료기록부가 허위로 기재되는 경우는 상당히 빈번하다. 지난 4일 낙태 수술을 한 뒤 진료기록부에는 다른 병명을 적고 이를 통해 요양 급여까지 타낸 산부인과 의사가 항소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거짓으로 작성된 진료기록부에 대해 의료인이 행정처분을 받은 사례는 2008년에서 2015년 사이에만 297회 발생했다.
의료인이 진료기록부를 허위로 작성하는 현상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돼왔다. 지난해에는 의료기관이 진료기록부 원본과 수정본을 의무적으로 보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의사가 진료기록부를 제대로 적지 않았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유는 뭘까? 의료 소송을 전담하는 변호사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 진료기록부 나중에 적었어도 ‘괜찮다’는 법원
의료사고 사건을 많이 수임해온 변호사들은 ‘거짓 진료기록부’가 계속 만들어지는 배경을 살펴보려면 의료법을 주목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의료법에 따라 의료인은 환자의 증상과 치료 내용 등을 담아 진료기록부를 사실대로 상세히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법 제233조에 의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그런데 진료기록부 작성 시기와 관련된 법 조항은 없다. 따라서 의료인이 치료 후 며칠에서 몇 달이 지나 진료기록부를 적었어도 처벌되지 않는다.
때문에 변호사들은 의사가 진료기록부를 허위로 작성할 여지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치료와 진료기록부 작성 사이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의료 소송 과정에서 법원은 의료인에게 ‘왜 이렇게 늦게 작성했느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이 경우 의료인이 ‘바빴다’고 답하면 문제 삼지 않는다. 이때 법원은 이 진료기록부가 진실하게 작성됐다는 전제하에 소송을 진행한다. 진료기록부를 늦게 작성했다고 해서 진료기록부가 허위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료기록부 기재사항의 진위가 제대로 가려지는 상황이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동찬 변호사는 “고의로든 아니든 허위로 진료기록부를 작성할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그러나 법원에서는 진료기록부가 잘못 기재됐다는 걸 밝혀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허위라는 걸 검사가 입증해야 하는데 진료와 치료에 참여하지도 않은 검사가 어떻게 그걸 입증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의료인들도 꽤 있어 환자 쪽 소송을 대리한 변호사들의 고충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한다. 정이원 변호사는 “의사들이 이를 악용해 유리한 쪽으로 소송을 끌어가는 경우가 있다. 산부인과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난다. 응급상황일 때 환자가 진료를 거절했다는 식으로 기재할 수 있고, 만약 그렇게 기재해도 이 기록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밝히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 진료기록부 작성기한 명문화할 필요 있다는 의견도
따라서 진료기록부 작성기한을 법에 명시하거나, 법원에서 진료기록부 지체 사유에 대해 좀 더 엄격히 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정이원 변호사는 “의사가 치료하고 시간이 지나서 진료기록부를 작성하면 기억이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법원이 그 사유를 정확하게 확인하거나 불이익을 줄 필요가 있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법원에서 따로 문제를 제기하고 의료인에 대해 심리를 진행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모든 병원이 전자 차트를 쓰도록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김신혜 변호사는 “개인병원이나 중소병원은 전자 차트를 안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누가 또 언제 진료기록부를 작성했는지 입증하기가 더욱 어렵다”며 “전자 차트를 쓰면 로그인 기록이 남아 (허위 기재를)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대안이 딱히 없을 듯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엄태섭 변호사는 “법원은 작성 시점이 주된 논점이 아니기 때문에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를 통해 근본적으로 진단서 기재사항의 진위를 가리는 데 주력한다. 다만 환자 입장에서 진단서의 허위 기재 여부를 입증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운 어려운 일”이라며 “해외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대안이 딱히 없을 것 같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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