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옛날 남자들은 대부분 수염을 길렀다. 멋을 위해서? 아니다. 면도가 위험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위험했냐 하면 중세 이발사는 외과의사를 겸했을 정도다. 다행히 겁 많은 미국인들이 19세기 후반 ‘질레트’ 안전면도기를 개발하면서 남자들은 선단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18년에만 350만 개의 질레트 안전 면도기와 3200만 개의 카트리지를 판매했다.
이후 1928년에는 ‘제이크 쉬크’가 전기면도기 특허를 냈다. 소위 건식면도기라고 불리는 전기면도기는 칼날이 철망 안에 완전히 숨어 있기 때문에 상처를 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후에 면도기 시장은 습식과 건식으로 나뉘었고 습식은 질레트와 쉬크가, 건식은 브라운과 필립스가 양분한다. 어째서 이 네 업체가 35억 명이 넘는 남자들의 마음을 70~80% 가까이 독식할 정도로 완벽한 독과점을 이뤘는지 누군가 분석해줬으면 좋겠다.
건식면도기 시장은 필립스와 브라운이 엎치락뒤치락하는데, 두 회사의 면도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필립스는 회전식 면도기이고, 브라운은 왕복식 면도기다. 사실 면도기는 써보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제품이 있고, 한번 정해지면 좀처럼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필립스는 회전식만 만들고 브라운은 왕복식만 만든다. 각자 영역의 파이만 가져가고, 나머지 영역은 상대에게 양보하는 거다.
오늘 소개하는 제품은 회전식 면도기인 필립스 S9000 프레스티지(SP9860)다. 소비자 가격이 65만 원에 이르는 필립스 최상위 모델 중에 하나다. 스마트폰을 제외한다면 크기 대비 가격이 가장 비싼 전자제품 중에 하나다. 통화도 안 되는 전기면도기가 왜 이리 비싼 것일까? 리뷰를 통해 알아보자.
심미적으로 보면 왕복식보다 회전식 면도기인 필립스 전기면도기가 훨씬 아름답다. 잘록한 헤드 이음부와 연결된 3개의 헤드가 참 감각적이다. 면도기 디자인이 왜 중요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어쨌든 예뻐서 나쁠 것은 없다. 그립감도 훌륭하다. 적당한 두께와 뒷면의 고무가 손에 착 달라붙는다.
스테인리스스틸의 몸체는 아주 모던하다. 버튼과 3단계 속도 조절 버튼이 적절한 곳에 위치하고 블랙 LED 디스플레이도 감각적이다. 면도기 디자인 중에서는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면도 실력이니 면도 느낌부터 얘기해보자. 실제 처음 면도를 해보고는 살짝 놀랐다. 면도기가 아니라 진동 중인 스마트폰을 턱에 댄 느낌이다. 원래 회전식 면도기들은 피부 자극이 적은 편인데, S9000 프레스티지는 그 수준을 넘어서 거의 피부자극이 없다. 과연 수염이 잘릴까 의문이 들 정도지만 어쨌든 수염은 잘린다. 다만 왕복식 면도기에 비해서는 절삭력이 약하다.
그런데 필립스 면도기의 철학은 시원시원한 절삭력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습식면도기를 이길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래서 필립스는 아예 건식면도기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피부 자극을 최소화하는 거다. 이를 위해 이번 모델은 ‘슈퍼 스킨 컴포트 링’ 기술을 추가했다. 특수 코팅된 스킨 보호용 안료를 발라 피부와의 접촉을 줄였다. 기존 필립스 면도기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이 이유가 있었다.
필립스의 상징인 3개의 헤드도 피부 자극을 줄이기 위한 고민 끝에 나온 기술이다. 얼굴의 굴곡에 따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3개의 헤드는 피부 손상을 줄이면서 빠른 면도를 돕는다. 이 부분도 기술적인 보강이 있다. 세계 최초로 8방향 무빙헤드 시스템이 탑재됐다. 각각의 헤드가 8방향으로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굴곡이 많아도 수염을 쉽게 깎을 수 있다. 실제로 수염을 놓치는 비율이 경쟁 면도기에 비해 덜하다.
피부 자극은 없지만 대신 수염의 절삭력이 약해질 수 있으니 이를 위해서 ‘나노스틸 정밀 블레이드’를 탑재했다고 한다. 특수 나노 코팅된 72개의 면도날이 분당 15만 번의 커팅을 한다. 이는 기존 제품 대비 3배 더 향상된 절삭력이라고 한다. 경쟁사인 브라운 면도기에 비해서도 분당 회전율이 더 높다. 하지만 실제로는 역시 절삭력이 시원시원하진 않다. 아무래도 면도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꼼꼼하고 세심한 남자들에게 어울리는 면도기다.
충전 스테이션은 놀랍게도 치(Qi) 호환 무선충전패드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발상이다. 면도기의 충전기는 평소에는 숨겨두기 마련인데 이 충전스테이션은 스마트폰도 충전이 가능하다.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많이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유용한 옵션이다. 게다가 내가 본 어떤 무선충전패드보다 디자인적으로도 뛰어나다.
트리머 헤드는 교체식이라서 일체형에 비해서는 살짝 불편하다. 다만 수염을 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예 필요 없는 부품이니 필립스 방식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을 거다. 게다가 헤드를 교체하는 방식이라서 코털 트리머만 구입하면 코털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필립스 전기면도기는 수염이 빨리 자라거나 빠르고 시원한 면도를 원한다면 적합한 제품이 아니다. 피부를 긁어내며 면도하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면도기를 사용하며 자극으로 인해 트러블이 생겨나거나 따가움 등을 자주 느낀 이들에게는 아주 괜찮은 솔루션이다. 새로운 필립스 S9000 프레스티지는 자신들의 장점을 더 강화한 모델이다. 피부 자극은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절삭력은 최대한 향상시켰다. 여기에 감각적인 디자인과 스마트폰 충전을 겸하는 무선충전패드, 강력한 모터를 추가했다. 예민한 피부와 덜 예민한 지갑을 가졌다면 최고의 면도기가 될 것이다.
필자 김정철은? IT기기 리뷰 크리에이터. 유튜브 채널 ‘기즈모’를 운영 중이다. ‘팝코넷’을 창업하고 ‘얼리어답터’ ‘더기어’ 편집장도 지냈다. IT기기 애호가 사이에서는 기술을 주제로 하는 ‘기즈모 블로그’ 운영자로 더 유명하다. 여행에도 관심이 많아 ‘제주도 절대가이드’를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지만, 돈은 별로 벌지 못했다. 기술에 대한 높은 식견을 위트 있는 필치로 풀어내며 노익장을 과시 중.
김정철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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