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시대가 지나면 촌스러운 이름들이 있다. 우리 부모님 대에는 ‘자’나 ‘순’ ‘숙’ 자로 끝나는 이름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내가 자랄 때는 내 이름 수진을 비롯해 지은, 은정, 민정, 지연, 혜진, 현주 등의 이름이 유행이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에게선 더 이상 이런 이름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서윤, 하윤, 하은, 지우, 서준, 민준, 도윤 같은 이름들이 인기라니까.
2005년 방영한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당당히 주인공임을 선언한 김삼순(김선아) 또한 시대에 맞지 않는 촌스러운 이름을 지닌 인물이다. 방앗간 집 셋째 딸로 태어나 바라던 아들이 아니란 이유로 할아버지가 홧김에 지어 그런지 조부 시절 유행하던 ‘순’자로 끝나는 것이 귀엽지만 촌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자신이 지은 건 아니지만 이름이 한 사람의 분위기와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은 독특했다. (드라마상) 예쁘거나 날씬하거나 젊지도 않고, 세련된 이름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제목에서부터 ‘내 이름은 김삼순’임을 선언하는 주체적인 여성을 내세운 것이 이 드라마가 ‘삼순이 신드롬’을 일으키는 데 큰 몫을 했다.
자신의 이름이 창피해 대외적으로는 ‘김희진’이라는 가명을 내세우길 좋아하지만, 삼순이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대학을 나오진 않았지만 자기 힘으로 프랑스의 ‘르 꼬르동 블루’로 유학을 다녀와 실력 있는 파티시에(pâtissier)가 되었고, 큰 키에 합당한 살집 때문에 조금 통통하긴 하지만 사랑할 땐 열렬한 사랑주의자이다.
남들 눈에는 뚱뚱하고 별 볼 일 없는 서른 살 노처녀(지금은 경악하지만 그땐 서른 살이면 노처녀 취급을 당했다!)이고, 자기 자신도 주제파악을 잘하는 편이지만 삼순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한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바람피우다 발각된 남자친구 민현우(이규한)에게 남들 눈치 안 보고 “날 사랑하긴 했었니?”라고 묻고, 처참하게 차인 뒤 남자화장실에서 귀신처럼 마스카라가 번진 채 오열할지언정 낮은 자존감의 소유자들처럼 내가 부족해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떠나감에 솔직하게 슬퍼할 뿐이다.
‘똥차 떠나면 벤츠 온다’고, 우리의 삼순이에게도 바람피우고도 뻔뻔한 태도로 이별을 고하던 민현우를 보내니 현진헌(현빈)이 나타난다. 비록 남자화장실에서 오열하던 비참한 상태에서 처음 만나고, 두 번째 만남에서도 실수로 머리카락이 진헌의 셔츠에 얽히는 바람에 가위로 잘라내는 아름답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진헌은 여러 모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역할에 부합되는 인물이다.
특급호텔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둔 그는 고급 레스토랑의 사장이자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 자신이 낸 교통사고로 형과 형수 부부가 세상을 뜨고 자신 또한 크게 다리를 다쳤으며 3년간 소식이 끊어진 전 연인이 있어 여주인공이 치유해줄 상처가 많다는 점 또한 이 장르 남자 주인공의 특징에 부합한다.
이들이 얽히는 계기 또한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다운데, 맞선 융단 폭격을 시도하는 어머니를 막고자 진헌이 삼순에게 계약연애를 제안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보증이 문제가 되어 집이 넘어갈 처지가 된 삼순이 5000만 원을 빌려주는 대가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물론 계약서에는 ‘절대 진짜 연애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지만, 어디 이 장르에서 그런 조항이 가능하겠느냐고. 게다가 남녀 주인공 모두 제각각 매력이 넘치는 인물들인데 말이지.
그래서 삼순이와 삼식이(삼순이 진헌에게 붙인 별명)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도 무한 가지 사랑이 있고 그 빛깔과 결은 모두 다르겠으나 불가항력적이라는 점에서 사랑은 무척이나 낭만적이고도 잔인하다. 진헌을 떠나 3년간 소식 한 장 없던 전 연인 김희진(정려원)이 사실은 위암 투병으로 말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음이 밝혀져 진헌과 희진이 눈물겨운 해후를 맞지만, 이미 진헌은 삼순을 만나 저도 모르게 삼순의 매력에 빠져버린 상태.
사랑을 위해 목숨 건 투병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마음이 떠나간 연인을 바라보는 희진, 아무 이유도 모른 채 3년간 연인을 잊어야 했다 새로운 사람의 매력에 빠진 진헌, 매번 사랑에 아파하면서도 자신 앞에 다가온 사랑에 용감하게 고백하고 받아들이는 삼순,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이 아니기에 이 상황은 더 잔인하게도 느껴진다.
한때 반짝반짝 빛났던 열렬한 사랑도 희미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 ‘내 이름은 김삼순’은 판타지 충만한 로맨틱 코미디와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의 경계에 서서 그 장점을 최대한 취합하며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 드라마’ ‘연애물의 지침서이자 교본’으로 자리매김했다. 드라마 결말에서도 그들은 진헌 어머니 나현숙 사장(나문희)의 반대로 흔히 해피엔딩으로 묘사되는 결혼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 결말이 결코 슬프지도 혹은 허황되지도 않다. 마지막 내레이션에서 삼순 또한 읊지 않았던가.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다. 어쩌면 우리도 헤어질 수 있겠구나. 연애라는 게 그런 거니까. 하지만 미리 두려워하진 않겠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이크를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더 사랑하는 것.’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내 이름은 김삼순’은 10여 년이 흘러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그건 이 드라마에 나오는 많은 캐릭터들이 자신의 욕망과 사랑에 솔직하고 당당해 매력적이기 때문일 터다.
멋진 남성을 보며 ‘내가 너무 굶은 거야’라며 두근두근거리고(삼순), 사랑의 힘을 믿고 목숨 걸고 투병 후 돌아오지만 떠나간 사랑 앞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며(희진), 자신에게 애매하게 추파를 던지는 남자에게 먼저 하룻밤을 제안하는(삼순의 언니 이영) 여성들이라니, 이 얼마나 시원시원 멋지냔 말이지. 비록 2019년에는 현진헌 캐릭터가 분노조절장애자가 아니냐는 의심과 함께 점수가 추락한 반면 젠틀하게 희진을 사랑하던 헨리(다니엘 헤니)에게 점수가 더 주어지는 상황이지만.
그러니 지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여, 혹은 사랑 앞에 주저하는 사람들이여, 모두 삼순이가 읊었던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구절을 떠올리시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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