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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랑] 한양, 한성, 경성, 서울…'또 다른 서울'을 만나다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부터 고도성장기까지 서울의 다채로운 모습 전시

2019.07.09(Tue) 16:09:48

[비즈한국] 자, 오늘은 서울 구경 한번 가볼까? 아니, 새삼스레 무슨 서울 구경이냐고? 오늘 떠날 서울 여행은 시간 여행이다. 600여 년 전, 처음 서울이 되었을 때의 서울로 떠나는 여행 말이다. 서울 종로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옛 서울의 모습을 생생히 만나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서울, 개항·대한제국기의 서울, 일제강점기의 서울, 고도성장기의 서울, 도시모형영상관 등 모두 5개의 상설 전시관과 특별 전시관, 야외 전시관에서 다채로운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의 서울 모습이 전시된 서울역사박물관 제1전시실 내부.  사진=구완회 제공

 

# 유교로 디자인한 도시

 

서울은 유교의 정신에 따라 설계한 도시다. 그걸 알 수 있는 책이 박물관 전시실 입구에 보인다. 중국 주나라의 예법을 기록한 ‘주례’라는 책인데, 여기에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만든 수도의 모습이 그림과 함께 잘 설명되어 있다. ‘주례’의 지도 가운데 부분에 ‘왕궁(王宮)’이란 글씨 양 옆으로는 ‘좌조(左祖)’와 ‘우사(右社)’라고 쓰여 있다. 왕궁은 궁궐을 가리키는 것이고, 좌조에서 ‘조’는 할아버지, 우사에서 ‘사’는 토지 신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가운데 궁궐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조상을 모시고, 오른쪽에는 토지 신을 모시라는 의미다. 

 

실제로 서울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종묘가 있고, 왼쪽에는 사직이 있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왕들을 모셔 놓은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곳이다. 그러니 한양은 ‘주례’에서 설명한 유교 이념대로 계획된 수도가 맞다. 

 

이렇듯 궁궐과 종묘, 사직단 등의 위치를 유교식으로 정했을 뿐 아니라 그 이름도 유교의 가르침에서 따왔다. 예를 들어 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은 ‘왕과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큰 복을 빈다’는 뜻이다.

 

# 조선의 궁궐이 다섯 개인 까닭

 

‘주례’를 지나면 궁궐과 성곽 위주의 간략한 옛 지도인 ‘한양도’가 보인다. 조선 시대 한양의 궁궐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까지 모두 5개다. 필요에 따라 하나씩 짓다 보니 이렇게 많은 궁궐이 생겼다. 

 

궁궐과 성곽 위주의 간략한 옛 지도인 ‘한양도’. 조선 시대 한양의 궁궐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까지 모두 5개다. 사진=구완회 제공

 

제일 먼저 지은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다음으로 창덕궁을 지었다. 만약 경복궁에 불이 난다든지 무슨 일이 생기면 임금님이 당장 옮겨갈 궁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궁궐 식구들이 점점 불어나면서 창덕궁 바로 옆에 창경궁을 지어서 왕족들을 머물게 했다. 이렇게 창경궁은 제3의 궁궐이라기보다는 창덕궁의 ‘보조 궁궐’ 성격이 강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이 몽땅 불에 타버리면서 새로 궁궐을 지어야 했다. 궁궐을 다시 지을 동안 임금님이 머물기 위해 임시로 만든 것이 경운궁(덕수궁)이다. 이곳은 원래 궁궐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왕족의 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가 임시로 머물면서 궁궐이 되었다.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지막 궁궐인 경희궁은 광해군이 반란의 기운을 막는다는 이유로 지은 궁궐이다. 실제로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광해군은 경희궁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 조선 시대 한양에도 강남, 강북이 있었다!

 

요즘의 한강처럼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나뉘었다. 청계천은 한양 가운데를 동서로 가로질렀다. 요즘 강남과 강북이 다르듯 조선 시대의 강남북도 달랐다. 물론 그때는 요즘처럼 강남, 강북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대신 청계천 북쪽을 북촌, 남쪽을 남촌, 중간을 중촌이라 불렀다. 그리고 지역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다른 분위기의 마을이 만들어졌다. 

 

북촌 양반집 내부 모습. 사진=구완회 제공


조선 시대 종로 운종가 상점을 재현한 모습. 사진=구완회 제공


궁궐에서 가까운 북촌에는 고위 관리들이 많이 살았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무래도 출퇴근하기 편한 곳에 무리 지어 살았기 때문이다. ‘북촌 한옥마을’은 아직도 이 지역에 한옥이 많이 남아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남촌은 남산 아랫마을이다. 여기에는 작은 관청이나 군영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위 관리 대신 중하위 관리들, 혹은 아직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선비들이 살았던 것. 

 

남촌과 북촌 사이에 있던 중촌은 이름처럼 중인들이 살던 곳이다. 중인이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으로 통역을 담당하던 역관, 병을 고치는 의관, 법률가인 율관 등을 말한다. 요즘으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들인 셈이다. 북촌과 남촌, 중촌에 대한 설명 역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당시 유물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의 서울, 개항∙대한제국기의 서울, 일제강점기의 서울, 고도성장기의 서울, 도시모형영상관 등 다채로운 서울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구완회 제공

 

<여행정보>

△위치: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55

△문의: 02-724-0274~6

△관람 시간: 3~10월 평일 9시~20시, 토··공휴일 9시~19시, 11~2월 평일 9시~20시, 토··공휴일 9시~18시

 

필자 구완회는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여성중앙’, ‘프라이데이’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여행출판팀장으로 ‘세계를 간다’, ‘100배 즐기기’ 등의 여행 가이드북 시리즈를 총괄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역사와 여행 이야기를 쓰고 있다.

구완회 여행작가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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